메리에게서 달걀을 사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바로 직후였다. 새로 이사 왔다고 근처에 사는 그녀가 자기 집에서 기른 닭에서 나왔다며 오가닉 프리레인지(Organic Free Range: 오가닉사료를 먹고 닭장 밖에서 뛰어놀던 닭이 낳은 계란)라며 달걀 꾸러미 하나(dozen, 12개)를 들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수줍음이 많아서인지 내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보는 틴에이지 아들과 함께였다. 이웃이라고 서로 인사도 할 겸 달걀판매 광고도할 겸 왔던 것 같다. 그 후 한 달에 한 번꼴로 4-5 꾸러미씩 달걀을 주문하면 가져다주었다. 서로 계란을 사고파는 사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농장을 방문했던 2024년 칠월이었다. 매번 그녀의 농장을 지나 만 다니다가 어느 날 여덟 마리 정도 있던 알파카와 라마가 두 마리로 줄어든 것을 보고 무슨 일 인가 싶었는데 마침 그녀가 농막 안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차를 세웠다. 그녀는 반색을 하며 자랑스럽게 가축들이 기거하는 우리 안을 보여 주었다. 가축 냄새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그곳에는 닭 70여 마리, 목이 긴 알파카와 라마 각각 한 마리씩, 염소 한 마리, 가축들을 지키는 그레이트피라니스 종의 커다란 하얀 개 두 마리가 같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여럿 있던 알파카들은 손이 너무 가서 다른 곳에 기증하였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남편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데 병이 점점 악화되어 가면서 힘든 육체노동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라 했다. 그녀의 수줍음이 많은 아들은 실은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며칠이 지나면서 나에게는 그녀의 남편이, 제이든의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같이 행복했던 기억을 사진으로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더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나는 메리에게 문자를 한 줄 보냈다.
“너네 가족사진 찍어줄까”
이 말에는 “너의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메리의 남편이 회복할 수 없는 병에 걸려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물론이지.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메리의 답신이었다. 그녀 역시 내 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나는 아무 대가 없이 사진을 찍었고 그녀는 그 사진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내게 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조율한 후, 팔월이 지나가는 화창한 여름의 끝머리에서 만나 가족사진을 찍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프다는 그 집 남편 데이비드도 만났고, 우울증의 내색은 전혀 없이 잘 자란 제이든과 엄마 메리 그리고 나와 내 아들 오스틴도 같이 참석했다. 가족대 가족의 만남. 이사 온 지 이년 반 만에 생긴 일이었다. 서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생각 외로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훨씬 편안함을 느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는 우리 부부와 비슷한 배경인 하이텍 가이(guy)로 인텔의 엔지니어로 재직했었고 메리는 인테리어디자이너라고 했다.
데이비드의 병명은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나에게 영어로 쓰인 의학용어는 기억이 거의 불가능한 장르다.) 신경이 점점 경직되어 간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일종의 루게릭이나 파킨슨과도 같은 병인데 훨씬 악성인 듯하였다. 그 이유로 그는 안면 근육을 거의 쓰지 못해서 웃지도 못했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정말 성심 성의껏 촬영에 임해주었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찍을 수 있어 나도 행복했다.
몇 주 후, 메리집으로 달걀을 가지러 갔다가 집 앞 포치(Porch)에서 휠체어를 보았다. 메리에게 문자로 물어보니 데이비드가 더 이상 걷지를 못한다고 한다. 휠체어는 집 안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불과 몇 주 전에도 혼자힘으로 걸으면서 농장에서 가축들과 같이 사진도 찍고 먹이도 주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더 늦기 전에 휠체어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메리에게 청하니 들르라고 했다. 달걀을 몇 줄 더 담아놓고 그녀와 집뜰을 걸으면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아래 두 장의 사진은 메리에게 연출을 부탁하여 찍은 것들이다. 내가 그녀에게 이 빈 휠체어 옆에 서있어 달라고 하니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다 알았다는 듯이 이런 포즈를 취해주었다. (오른쪽아래) 우리는 벌써 데이비드가 떠나고 주인 없이 혼자 남을 휠체어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원을 지키는 천사: 메리가 처음 이곳의 집을 살 때 여기 보이는 천사상을 같이 끼워 파는 조건을 이전 집주인에게 걸었다고 할 만큼 그녀는 이 천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 집의 수호신 같았다.)
정원의 사진을 메리에게 보내주면서 봄이 되면 데이비드가 휠체어에 앉아 메리가 가꾸어 놓은 정원을 즐기는 모습을 찍자고 하였다. 그녀는 내 문자에 커다란 핑크하트를 붙여서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농장에도 눈이 내렸고 어느 날 봄이 왔고 그 사이에도 데이비드는 몇 번이나 침대에서 떨어져 응급실로 향했다고 했고 메리는 점점 지쳐가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모습을 찍은 종군기자들이나 인간이나 생물의 처참한 모습을 담는 사진가들의 마음이 어떨까는 더 이상 생각도 안 한다. 나는 못 찍는 장르라고만 정리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고인이 된 살가도와의 만남을 되뇌곤 한다. 그런 사진들을 찍으면서 자기도 죽어가고 있었다고. 그래서 자신이 살기 위해 아마존 밀림을 살리는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데이비드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가족들은 남아있는 짧은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가족들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 역시 그의 면전에 사진기를 들이댈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지난 유월, 일본에 워크숍을 갔을 때 미국 서부 시간으로 새벽 세시에 메리로부터 문자하나를 받았다. 방금, 남편인 데이비드가 돌아가셨다고.
그때 바로 집을 떠나기 전 메리네 농장 밖에서 찍었던 이 닭 한 마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자꾸 눈이 가는 친구였다고 기억한다.
사족: 위의 사진은 내가 필름 카메라로 찍기 시작하였던 때의 사진이다. 그녀의 가족사진을 찍는 일 년 동안 나는 디지털에서 필름으로 서서히 확장하고 있었고, 메리의 아들 제이든은 고등학교를 성공적으로 졸업했고, 메리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다. 라이카 M6 바디에 녹틸러스 50mm, F1.2 렌즈를 사용했다. 이상하게 필름으로 찍는 사진은 나의 감정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