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감정의 피날레.
김장 주문 8통을 받았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동네 목욕탕에서 나름 인싸로 유명하시다.
엄청난 자존감과 자기 관리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언니.
제 아무리 '진양철' 회장의 카리스마라 해도 대적하실 인상파 외모와 말발까지 탑재한 센 언니.
전원생활의 로망으로 일찌감치 아파트를 처분하고 집을 지으셨다.
소일거리로 직접 채소를 재배하고 키우시려고 소박하게(?) 텃밭 400평을 아버님과 부지런히 일구신다.
더운 여름엔 들깨를 터시고 고추를 심고, 김장을 위한 배추도 직접 심고 키우신다.
매년 일정량의 김장 주문을 받으셔서 지혜롭게 살림도 운영하신다.
"제가 금요일 오전에 가서 도와드릴게요."
아뿔싸! 양념 만들기나 배추 씻기 등 얼마나 힘드실지 알기에 덜컥 말씀을 드리고 말았다.
오후 수업을 준비하고 청소까지 하려면 빠듯한데. 남편이 연차 내고 가서 도울 텐데.
토요일 본 김장 때 가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역시나 금요일 오전 9시 돌연 가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말았다.
남편도 옆에서 수업 시간 빠듯한데 왜 간다고 했냐고 혼자 가겠다고 말한다.
어머님은 일을 벌여놨는데 어찌할지 방법을 연구하시겠다며 일단 전화를 끊자고 하신다.
수업을 마치니 저녁 8시.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했다.
나 하나 바쁘게 움직이면 됐는데 난 왜 가지 않았을까?
좀 더 일찍 일어나 청소를 미리 하고 잠을 좀 못 자더라도 수업 준비를 해놨어야 했는데 혹시 안 가고 싶었던 건 아닐까?
김장하는데 대만 여행 일정을 잡은 시누이 소식에 은근 뿔이 난 걸까?
요즘 감정의 거리두기를 연습하고 있다.
결혼 초반엔 좀만 서두르면 오늘 하루 잠깐 피곤하면 될 것을 하며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고 따랐다.
어른들 말씀은 다 일리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특별히 거스르지 않았다.
혹시나 실수하여 친정어머니 욕 먹일까 봐 더 낮춰서 행동하곤 했다.
골드미스 친구가 너처럼은 시댁에 안 해야겠다고 할 정도였다.
어느 순간 아닌 건 아니라고 하고,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야 오히려 이 관계가 오래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 못 하시고 막힌 분도 아니신 데다가 평생 얼굴 보고 살 가족이니까.
이제 나의 포지션을 재정비할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금요일은 못 갈 상황인걸 알면서도 어설프게 답을 드린 건 엄연한 내 잘못이다.
줬다 뺐는 게 가장 치사한 것처럼 말이다.
온종일 외면했던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남편의 톡이 와있다. 남편은 고부간 중간자 역할을 잘하는 편인데 하루 종일 어머니를 도우며 화를 반 정도 풀어드렸다고 으쓱해한다. 싸릉한다. 오늘은 '남'의 '편'이 아니구나. 최소한의 팀워크는 있는 양반이었구려.
그래.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 외며느리 내치 시기야 하겠어. 내일 가서 애교 3단 콤보로 녹여드려야지.
어머니.
일주일에 한 번씩 등 마사지, 얼굴 마사지해드리는 며느리는 저밖에 없을 거예요. 제가 잘하는 걸로 효도할게요. 그러니 김장 1일 차는 아들. 사위. 딸에게 양보합니다.
I love you, but I c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