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쌈 만드는 거 많이 어렵니?"
"월남쌈 하시게요? 재료 써는 게 관건이긴 해요, 어머님."
"아니. 네가 좀 만들어줬으면 해서"
30년 지기 친구분들이 오시기로 하셨다며 음식 준비에 한창이신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전화 한 통에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 알. 못인 내가? 요리엔 관심이 별로 없다. 가장 맛있는 요리는? 바로 남이 해준 음식. 혼자 살았다면 다이어트 도시락을 배달시키거나 샐러드를 시켜 먹고살았을게 틀림없다. 나물 반찬 하나에 국 하나 보글보글 끓이는 것도 2시간이 훌쩍 넘어가는데 월남쌈은 언제 하지? 그것도 당장 다음 날 저녁에 도착하시니 당일 오전까지는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유일한 힐링 타임인 오전은 오늘은 틀린 것 같다. 좋아하시는 아귀찜을 사다 드린다 할 때 괜찮다고 거절하셨는데 월남쌈이 생각나셨나 보다.
오후엔 수업이 있으니 오전에 부랴부랴 장을 미리 봐 둔다. 라이스페이퍼는 두 팩으로 넉넉하게 소스는 칠리, 땅콩, 파인애플로 다양하게 준비해 미리 쟁여 놓는다. 오리고기, 새우, 샤부샤부용 고기와 각종 채소를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쌓는다. 이왕 하는 거 보기 좋게 담을 도시락통도 하나 구입해본다.
집에 오자마자 오후 수업 준비에 돌입한다. 공부방 수업이 끝나면 바로 식구들 저녁을 준비한다. 그날따라 중학생 줌 수업까지 있어서 다 끝나니 밤 10시 30분이다. 평소 같으면 둘째 책을 읽어주다 자겠지만 지금은 월남쌈을 준비해야 할 때. 채소부터 뽀독뽀독 씻어 물기를 뺀다. 채반에 알록달록한 파프리카들이 예쁘긴 하다. 고기와 새우 간을 해 익혀두고 계란 지단도 나름 해본다. 식당에서 본 것처럼 얄팍하고 이쁘진 않지만 냄새는 꼬소름하다.
아이들은 엄마 힘들겠다며 나름 위로 한마디 건네고 들어간다. 도와주겠다는 아들 1호를 내일 학교 가야 한다며 들여보내 본다. 남편은 이미 알코올과 한 몸이 되어 거실에 널브러져 있다.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인지 벌써 시계는 3시를 향해 간다. 드디어 라이스페이퍼에 재료를 올리고 돌돌 말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나의 무식함이 마음 저편의 짜증과 만나 터지고 말았다. 나름 깔끔하게 보이게 한다며 도시락통에 키친타월을 깔고 그 위에 월남쌈을 올렸는데 나중에 보니 월남쌈과 키친타월이 한 몸이 되어 아예 떡이 된 것이다. 왜 종이류와 딱 붙는다는 생각을 못한 것인지. 검색을 해보니 참기름을 살짝 바르면서 만들면 붙지 않는다던데 그걸 어찌 알았겠나. 결국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 새벽에 난 왜 이러고 있는 건지. 공부방 운영하며 나름 바쁜데 왜 잠 못 자고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하는 건지. 평소에 요리해드리지도 않으면서 이거 한 번 한다고 화내는 못된 며느리가 된 생각도 들었다가 거절을 못하는 자신이 싫어져 분노는 더해졌다. 이중 삼중의 복합적인 이유로 화가 치밀었다. 거기다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곰 같은 남편은 눈치도 없이 잠을 자고 있다. 거실 불이 훤히 켜져 있는데도. 데굴데굴 굴려볼까 하던 찰나 마침 부스스한 눈으로 깨어난 남편이 사태를 파악하곤 말한다.
"아구야. 어머니가 잘못하셨네. 요리도 못하는데 요리를 시키셨네. 가끔 이렇게 생뚱맞게 뭘 시키신다니까. 우리 부인 바쁘고 피곤한데. 그렇지? 뭐 마시고 싶은 거 없어? 요로 호이 한 캔 사다주까?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옵소서."
"콜라. 콜라 사다 줘. 엄청 시원한 걸로"
청량하고 따끔따끔한 목 넘김에 속이 개운하다. 급발진한 감정을 식히기에 제격이다. 이제 남은 재료를 살려내 작은 도시락통에 가지런히 재료별로 담았다. 남편도 뒷정리에 한창이다. 새벽 4시 30분, 도시락통은 정갈하게 5층으로 쌓여있다.
그래. 며느리도 자식인데 이런 것도 못 해 드리면 되나. 하지만 다음엔 이렇게 말해볼까?
" 어머님, 직접 해드리고 싶은데 일이 바빠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유명한 월남쌈 맛집에서 제가 사다 드릴게요. "
사진 출처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