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머리에 땅 하고 느낌이 오는 부분이 있었는데 어른이 되어 읽으니 또 다른 부분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세월의 힘인가.
40편의 한국 단편 소설이 있는 책이다.
이 중 수업에서는 네 가지 소설을 읽고 질문을 준비해 왔다.
'운수 좋은 날', '벙어리 삼룡이', '메밀꽃 필 무렵', '수난이대'
학창 시절 수능 국어 시험을 위해 시험용으로 읽을 때 말고는 처음 읽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이 시대의 이야기는 슬프고 안타깝고 속상하고 아프다.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낸 그분들이 아련하고
존경스러웠다.
기구한 여인들의 삶.
설렁탕도 마음껏 사 먹을 수 없는 하층민의 삶.
벌이가 잘 되는 날이 오히려 불안한 아이러니한 삶.
2대에 걸쳐 전쟁에 나가느라 개인의 인생이 바뀌는 삶.
각 시대마다 펼쳐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인생이 변화되고 휩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의 문학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일 거다.
문학은 그 시대의 모습을 지독히도 담고 있다.
사회를 고발하기도 하고 애써 외면하는 모습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혹은 공감되는 이야기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사회의 치부까지 드러내며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록의 문학은 후대에게 역사가 된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또 하나의 삶의 모습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게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이렇게 내가 한국 문학을 보며 일제강점기 때의 삶을, 태평양 전쟁과 6.25 전쟁 이후의 삶을 알게 되는 것처럼
문학이란 인간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처연하고 마음의 울림을 준다.
네 작품들 중 '이효석'작가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으며 언어의 미학을 느낄 수 있었다.
허 생원은 달이 뜨는 밤이면 봉평에서 있었던 성씨네 처녀와의 밤을 항상 떠올리며 조 선달에게 이야기한다.
그만큼 그에겐 추억이 있는 날이다.
'이 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길은 지금 산 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어찌 보면 하룻밤 사랑이야기인데 그 표현이 수려하다.
달밤의 묘사가 이 밤의 당위성마저 쥐어준다.
여인은 이후 홀로 아이를 키워내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지만 표현만은 이리도 아름답다.
슬프고 가슴 아파서 도려내고 싶은 시기일지라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니 사람이 함부로 지워내지 못할 것이다.
그땐 그 모습대로의 삶이 있고, 결국엔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희망과 삶의 의지로 결국 살아냈으니까. 지금 2020년대의 삶은 이 순간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보일까?
문학은 역사다.
문학은 일기다.
문학은 추억이다.
문학은 인간의 삶이다.
하여 문학은 오래도록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그만의 방법으로 어루만져 줄 것이다.
문학은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