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혼자 가는 제주도
오후 4시. 출발 6시간째.
한림항에서 협재해변까지.
들르고 싶었던 매장은 총 4곳이었다.
푸딩으로 유명한 '우무 푸딩'
서울 합정점을 찾아갔으나 폐업 해 방문하지 못했던 '가르송티미드'
제주도에 오면 꼭 들르는 망고 음료 맛집 '리치 망고'.
아침 9시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 자신을 위한 대창 덮밥집 '듬삭한'
우무(UMU) 푸딩은 우뭇가사리로 만드는 푸딩 전문점인데, 우뭇가사리로 만들어진 것이 한 번에 연상되기를 바라 지어진 상호라고 한다. 제주 해녀의 주 수입원은 '우뭇가사리'인데,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이 우뭇가사리를 묵을 만드는데만 이용하기 때문에 채집한 우뭇가사리 판매는 해외 수출에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우뭇가사리'는 제주해녀가 채취한 붉은 해초를 말하는데 이 해초를 자연 바람과 햇빛에 말리면 얼마 뒤 하얀 색깔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비록 작은 가게로 시작했지만, 제주 해녀와 우뭇가사리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 이 푸딩 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주인장.
우무 푸딩은 일반 푸딩과 달리 젤라틴이나 한천이 아닌 우뭇가사리 원물을 오래도록 고아서 만든 푸딩이다. 그렇기 때문에 맛의 미묘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일부러 우무 푸딩을 찾아주는 손님들을 위해 맛 차이를 균일하게 맞추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2018년 11월 첫 가오픈을 시작으로 3년째 같은 곳에서 영업 중인 우무 푸딩. (내가 갔던 옹포리가 1호점, 제주시 원도심에 있는 매장이 2호 점이다.)
실제로 우무(umu) 인스타 계정 @jeju.umu에 들어가 보면 첫 영업 당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설레는 시작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도 안 보는 인스타를 하고 있지만 이 순간 혼자 벅참.'
주인장은 알았을까. 자신의 작지만 소중한 가게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될 것이란 걸.
주인장은 우리가 가볍게 생각했던 해조류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을 연구하고 하나의 가치 있는 제품으로 만들어냈다. 눈이 높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제품만을 구매하는 것이 아닌 그 제품에 담긴 브랜드 철학을 같이 구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파라시(seaspiracy)'에는 사실 오메가 3를 섭취하기 위해서는 생선이 아닌 식물성 식품인 해조유(해조에서 추출하는 기름)를 통해 섭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생선 또한 바다 식물인 해초를 통해 여러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오메가 3이 풍부하게 담긴 생선을 먹은 것이 아닌 오메가 3가 듬뿍 담긴 해초를 섭취한 생선을 먹은 것뿐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를 보면 그것을 만들어낸 창작자의 브랜드 철학이 단순히 돈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에 가치를 두고 제품을 생산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우무 푸딩에서 출시한 메뉴는 구좌읍 특산품인 '구좌 당근'으로 만든 것인데, 우무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제철 특산물을 이용한 시즌 메뉴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운 좋게 이번에 내가 맛보았던 푸딩이다.)
구좌 당근의 명성은 지난 2015년 7박 8일 여행 당시에도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일부러 당근 주스로 유명한 구좌읍 매장에 들러 맛을 본 적도 있었다.
2015년 구좌읍에서 먹은 당근 주스 사진에 웬만한 항마력으로는 읽을 수 없는 글들이 적혀있다.
다시 돌아와서 말하자면 나는 이곳의 푸딩을 맛보기 전까진 이 작은 가게 '우무 푸딩'의 브랜드 철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너무 바빠서 알아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제주에는 굉장히 많은 인스타 핫플레이스가 있다. 여느 인스타 핫플이 그러하듯 우무 푸딩 또한 사람 많고, 어디선가 먹어본 그런 맛이고, 그냥 사진만 열심히 찍고 인증샷만 남기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인스타 핫플이라니까 가는 길에 잠깐 들를까? 하고 갔던 곳인데 그날 밤 숙소에서 우무 인스타 계정을 살펴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제품을 생산해내는데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진지한 자세로 장사에 임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후 4시.
한림 환승 정류장에서 약 17분을 걷다 보면 우무 푸딩이 나온다.
드디어. 드! 디! 어!
저 멀리 보이는 우무 푸딩.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다고 하던데 내가 방문한 시간이 피크 타임이 아니라 그런지 다행히 사람이 몇 없었다.
입구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 방금 푸딩을 구매한 듯한 구매자가 잔뜩 신이 나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오, 운이 좋군. 대기 줄이 없다니.
올해 내가 뭘 해도 잘 풀린단 말야??
운빨 좋은 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품고 서둘러 가게 안으로 빨려가듯 들어갔다.
6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커피도)
재빨리 푸딩을 구매해 한입에 털어놓고 싶었다.
가게 안은 작고 아담했다.
붐빌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조용하고 따뜻했다.
-잠시만요~
새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가게 안은 정돈 중이었다. 직원분께서 분주하게 커튼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셨다.
여유로운 분위기에 그제야 내가 제주로 여행을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천천히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귀여운 푸딩들이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네가 바로 구좌 당근 푸딩이구나.
주문을 하기 전 한 번 더 가게 안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데 뒤에서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응?? 저분은 왜 안 가시고 가게 앞에 계속 서계시지???
내가 들어오기 전에 가게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시던 분이었다.
0.1초
0.2초
0.3초
0.8초
0.9초
1초.
상황 파악은 끝났다.
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분께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새치기를 했나요...?"
그분께서 잠깐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먼저 하세요~" (*´꒳`*)
먼저...하세요세요세요...
그 말인즉슨,
내가... 새치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분의 시점에서 서술해 보자면,
정규 교육 과정을 밟은 문화시민으로서, 코 시국이라는 전 세계적 위기 상황에 발맞춰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줄 서 있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의 차례가 되어 들어가려 했는데
웬 여자애가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지 차례도 아닌데, 얌체처럼 쑉 들어가서는 뻔뻔한 얼굴로 안에서 사진도 찍고 푸딩도 고르고 지 혼자 여행의 여유를 만끽하며 북 치고 장구 치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을 겪은 것이다.
준법의 결과=새치기당함
당시 나는 근본 없는 놈 중에 최고였다고 한다.
나중에 우무 인스타 계정에 들어가 보니 가게 내부가 작아 한 팀씩만 입장을 제한하고 있었다.
원래는 "죄송합니다." 하고 바로 나왔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너무 창피하고 당황스럽고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래서 숨은 곳이 가게 안.
가게 문을 꼭 닫고 들어갔다. 아무도 나를 못 보게.
하지만 가게는 창문이 있는 곳.
식은땀이 나 물건을 사자마자 후다닥 줄행랑을 쳤다. (기억으로는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사진은 찍었던 것 같다. 뻔뻔하기가 국보급)
줄행랑을 치기 전에 그분께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다.
사과를 드리며 부디 그분이 올해 겪은 어이없는 리스트 10위권 밖으로 이 새치기 스토리가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디 10위권 밖으로!!!)
물론 멀리 도망가진 못했다.
이곳은 핫플이 모여 있는 곳.
바로 옆 옆 가게로 약 5초간 필사의 줄행랑을 친 것으로 이 새치기범 스토리는 마무리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