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나는 다 계획이 있다

-또?! 혼자 가는 제주도

by 일필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해가 떴다.




현재 협재해변의 날씨는



16도.




내 인생 가장 추웠던 16도.







제주도의 16도는 육지의 16도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바람이 얼마나 부느냐이다.




바람 때문에 카메라가 흔들리는 중













당시 체감 온도. 눈발이 날려도 이상하지 않았던 날씨.





카페 그루브 밖은 초겨울 날씨였다.



해변에는 반바지를 입은 남자분들과 여름 가을용 얇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분들이 산뜻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꺄르르르르. 다 됐어? 줘봐. 쫌 보게.







나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겠구나. 절레절레 전래동화.

(16화 날조된 사진 편 참고)








다시 말하지만 현재 난 이런 상태다.

날조된 사진의 피해자






사진을 찍으며 버텨보려 하였지만 햇볕 정책이 얼마나 뛰어난 정책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숙소로 돌아갔다.





사진상으로는 참 따뜻해 보이는데.









오후 12시 10분.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제주바람은 자신을 무시한 나약한 육지 녀석에게 참 교육을 시켜주었다.









우리 할머니도 너보다 더 건강하겠다.



반바지를 입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겠다는 야무진 생각은 고이 집어넣었다.





사실 밖이 너무 추워서 나가기 싫었는데 이 순간을 또 언제 즐길까 싶어 몸을 바삐 움직였다.

낮이 짧은 제주 가을을 즐기기 위해서는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겨울 여행 2번 그리고 이번 가을 여행 1번.





2015년 첫 여행 당시.


종달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어르신께서 12월의 제주는 볼 게 없다며 왜 겨울에 왔냐고 물어보셨다.


제주의 겨울이 워낙 기상 변화가 심하고 추울 땐 한 없이 춥기 때문에 모처럼 온 손녀뻘 여행객이 제대로 즐기고 가지 못할까 하는 걱정 어린 마음에 건네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어르신의 이러한 따뜻한 마음 덕분에 여행객의 기준에서는 겨울의 제주도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모든 것이 잠들고 소멸하는 계절.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계절.




겨울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여행마저 겨울 여행을 선택하는 것은




덥고 습한 것이 너무나도 싫기 때문이다.








여름을 싫어하고, 민트 초코를 싫어하며, 부먹과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







민트 초코로 이 닦고 계신 침착맨 이말년 선생




그래. 내가 생각하는 민트 초코의 위치는 딱 저 정도다.

민트는 치약 만들 때나 쓰는 것.






여름의 나는 출퇴근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집 밖에 나가질 않는다. 그 정도로 여름을 싫어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엄청난 기후변화를 겪고 난 뒤에 집 밖은 위험해 병의 증상이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래서 여름휴가는 대부분 한창 더위가 꺾인 9월 이후에 갔던 것 같다. 여름 아닌 여름휴가.






이런 이유로 제주도의 가을 추위, 그래도 더위보다는 해볼 만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작년엔 젊었고, 지금은 아니다.









또래보다 나약한 육신.










이런 엄청난 추위로부터 내 몸을 지킬 비장의 무기가 하나 있다. 바로 우비.





우비는 정말 쓸모가 있는 옷이다.

특히 비가 가로로 내릴 때 그 기능이 빛을 발한다.




여름의 태풍, 겨울의 눈.

우비만큼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와 내 옷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싶다.


2015년 12월 우도 서빈백사에서




100프로 방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방수가 되기 때문에 모래사장에 철퍼덕 앉아도 걱정이 없다. 또 제주 바람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혹여나 바람막이를 갖고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외투 위에 걸쳐 입기도 괜찮다.



+ 야구경기 보러 갈 때도 굉장히 유용하다.






티셔츠, 니트, 잠바, 우비까지 걸치고 나니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사람이 잘 오지 않는 협재 해변 구석에 앉아 멍하니 비양도를 바라봤다.






난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생각이 복잡하거나 시련을 당했다거나 퇴사를 앞둔 사람이라면

사연 있는 표정으로 바닷가에 앉아 있겠지만



난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오늘 저녁 뭐 먹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여행.




이에 반해 쉬러 와서 쉬지 못하는 여행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각자의 삶이 너무도 치열해 놀아도 노는 것이 아닌 그런 여행을 대부분 하고 있다.

쉬러 왔는데 쉬지 못하는 삶.



무계획한 여행은 가치 없는 여행이라 생각해 우리는 여행지에서조차 자신을 끊임없이 채근한다.




과거의 나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회사 생활이 조카 같았을 때는 조급한 마음만 가득했다.

조카 같지만 여기서 나가면 패배자가 될 것만 같고, 여기서도 못 버티는 내가 밖에 나가서도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생각했다.



내가 나가서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대체 내가.






하지만 결국 나왔다.



못 버텨서 나온 게 아니다.


이곳이. 내가 아등바등 버텼던 이곳이.

더 이상 내가 버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곳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퇴사 예정자나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흔히 하는 말들이 있다.



퇴사 전 이직 플랜을 잘 짜라.




하지만 계획을 짠다고 우리의 인생이 언제 계획대로 풀린 적이 있던가.










소위 말해 성공한 사람들의 기준에선 계획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사람들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주 작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에겐 자신의 커리어가 중요하겠지만



나에겐 나밖에 없다.


세상에서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퇴사를 선택했다.




주위에

퇴사를 선택한 친구가 있다면 걱정과 우려보다는 격려를 해주려고 하는 편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라는 오지랖 가득한 말이 아닌.




잘했어. 진짜 잘했어. 네가 우선이지. 어딜 가나 네 자리는 있을 거야. 걱정 말고 시원하게 나와.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선택에 대해 걱정이랍시고 그 선택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 한다.

그 사람이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고민과 눈물의 밤을 모른 채 말이다.











2021년 현재.



마음이 여유롭고 현생이 편안하니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이직 플랜 없이 퇴사를 결정했지만

현재 난, 최고의 오너 밑에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분야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해변에 앉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나의 휴가로 인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계실 원장님이었다.



휴가는 매년 갔지만 이렇게 마음 편히 갔다 올 수 있었던 여행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늘 부하직원인 나를 위해 배려해주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는 원장님 덕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퇴근 후에 일에 대한 스트레스, 동료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원장님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 같다.




부하직원의 마음까지 신경 써주시는 분을 위해 오래오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해변에 아무 계획 없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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