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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색 Jul 14. 2022

저장강박증과 청소

시드니 셰어하우스의 변화

초봄에 이사하면서 다양한 잡동사니들을 버려야 했다.


꽤 넓은 창고와 집안 구석구석 빼곡히 채워져 있던 각종 물건들 대부분은 빈 플라스틱 병, 이미 용도를 다했거나 재활용도 할 수 없는 부속품, 오래된 전자기기처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데 버리지 못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오래되었으나 박물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을 만큼 희소하지도 않고 심지어 망가져 작동조차 되지 않는 잡다한 소모품 등이 넘쳐났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물건인지 그 출처와 용도도 가물가물한 물건들 중 태반이 낡고 해지고 볼품없어 아무리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덧칠해봐도 내 눈엔 쓰레기였다.


이사 온 집이 신축이라 깨끗하고 공간 배치가 좋은 대신 창고도 없고 평수가 좁아졌기에 안 쓰는 물건 정리 및 버리기는 필수였다.


몇 년 동안 외할머니를 돌보다 최근 혼자 생활한 기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엄마에게 그 잡동사니들은 언젠가 필요한 순간이 올 수 있다는 미련과 추억이 깃들어 무엇 하나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거의 1년 가까이 엄마를 설득하던 게 씨알도 안 먹히다가 이사를 계기로 둘 곳 없어진 짐들을 마침내 처분하게 되었다.


아마도 엄마는 가볍게 저장강박증을 앓고 계셨던 듯싶다.

저장강박증은 '쓸모없거나 가치 없는 물건을 못 버리거나 수집하는 증상'으로 처음엔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모아두다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쓸모없는 물건을 사 모으게 된다. 심해지면 쌓아둔 물건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고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고 한다.


다행히 엄마의 경우 심각해지기 전에 이사와 짐 정리가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이제와 생각해보니 '저장'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만큼 혼자 외할머니를 돌보고 돌발 상황에서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엄마로 하여금 '혹시 필요한 순간'이 올까 봐 불안해서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버릴 수 없었던 건 아닐까.


버리기로 마음을 결정한 엄마는 달라졌다. 이삿날 창고 하나만큼 버리고도 거의 한 달 가까이 버리고 또 버려야 했던 엄마는 이젠 모든 물건들을 전시하듯 나열하던 습관도 정리하신 듯했다.


그 사이 나는 잔소리 대마왕이라는 불명예 별칭을 하나 더 얻어야 했지만 눈에 띄게 달라진 엄마의 변화가 내겐 최고의 보상이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다.


꽤 오래전 이야기지만 호주에서 3개월간 장기 체류했던 때의 일이다.


졸업 이후 쉼 없이 사회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계획하고 6개월 정도 해외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꿈꾸던 어학연수 비용을 줄이기 위해 필리핀서 3개월간 스파르타 기숙형 어학원에서 연수를 받고 호주로 넘어가 3개월간 장기 배낭여행을 했다. 당시 관광비자로 최대한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인 3개월을 꽉 채워 여행을 즐기다 돌아왔다. 돌아올 즈음엔 좀 더 머무를까 싶어서 취업이나 어학원 입학 등을 고려할 정도로 즐거운 추억이 한가득이었다.


호주 여행의 첫 시작을 시드니로 정한 건 호주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인 이유 외에도 최대한 동선을 줄여 교통비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3주 가까이 시드니에 머무르며 구석구석 가보고 싶은 곳을 다 가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는 숙박비를 줄여보고자 용감하게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한국인 유학생이 운영하는 셰어하우스를 한 곳 정해서 3주 내내 머물렀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환경 등 새로운 경험과 추억이 오래도록 인상 깊게 남아있다.


특히 가장 기억이 남았던 건 오늘의 주제인 '청소'에 대한 얘기다.


내가 찾아간 셰어하우스는 한국인 유학생 부부가 공동으로 얻은 아파트로 높은 층수를 가진 건물이었고 중간에 입주민을 위한 실내수영장이 있을 정도로 꽤 비싸 보이는 아파트였다. 거의 40~50평 규모의 넓은 공간이었다.


다만 내가 쓸 공간은 다른 여성이 이미 입주해 지내고 있는 방에 이층 침대가 2개 있었는데 각자 하나씩 나눠 쓰게 되었다. 낯선 룸메이트가 생겼지만 일반 배낭여행객을 위한 저렴한 숙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편의시설(거실, 화장실, 주방, 그밖에 세탁기와 같은 전자기기 공동사용 가능)이 갖춰져 있었다.


집주인 부인이 한국에 들어가 아파트를 비운 지 꽤 돼서 현재 집주인과 또 다른 남성 입주민, 내 룸메이트가 된 여성 입주민(벌써 1년째 시드니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인 워킹홀리데이 비자 체류자)과 나까지 4명이서 한 동안 지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룸메이트 외에는 3주 동안 얼굴 마주칠 일조차 없었지만, 처음엔 낯선 사람들과의 셰어하우스 생활에 대해 막연한 불안으로 여러 커뮤니티 후기 등을 몇 시간 동안 찾아보고 나서야 결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여행하러 온 관광객이니 목적은 최대한 다양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구경할 예정이라 숙소는 씻고 안전하게 잘 수만 있으면 별 상관없었다. 아침식사도 우유에 콘프로스트를 말아먹거나 간단한 샌드위치 등으로 해결했기에 밥 해먹을 일도 없으니 필요한 공간이나 편의시설이라 해봐야 내가 쓸 침대나 세탁기 정도 외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애초에 숙박 비용이 거의 반 이상 저렴했기 때문에 셰어하우스를 계약했던 터라 기대 이상 넓은 공간과 더불어 아파트 내 외부에 모든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어 운이 좋다 생각했다.


단순히 비용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횡재한 기분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만 빼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는 '청소'였다. 나중에서야 전해 듣기로,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는 방은 개인 공간이라 그나마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으나 나머지 공유 공간은 집주인 부인이 한국으로 떠난 이후로 아무도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히 얼마나 청소를 안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더러운 상태가 꽤 심각했다.


처음엔 몰랐다. 셰어하우스 계약금을 집주인에게 지불하고 짐을 풀고 씻자마자 바로 잠든 다음 날 아침에서야 마주친 '상태'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전날 밤 화장실 변기 상태를 보고 깜짝 놀라긴 했으나 뭐 청소를 잘하지 않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오랜 비행과 여독이 쌓여 호주에 도착한 이후로 한 동안 피로에 찌들어 있었던 터라 세세하게 모든 걸 살피고 따질 정신도 몸 상태도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다들 학교 가고 출근한 후 혼자 남아 씻고 아침식사를 간단히 먹으러 부엌에 갔을 때 부닥쳤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문제에!


초파리가 좀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싱크대를 연 순간 상한 음식 주위로 덩어리처럼 뭉쳐져 있는 초파리 떼를 마주한 순간 재앙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집 안의 심각한 오염상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실 등 집안 내부에 빠짐없이 깔아져 있던 카펫 청소를 얼마나 안 했는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먼지뿐 아니라 죽은 벌레 사체들이 구석구석 틈 없이 쌓여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쓰레기집이었다. '오 마이 갓(OMG)'이 절로 외쳐졌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던지 한 동안 얼음 상태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성의 끈을 겨우 붙들었다.


원래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바로 나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청소도구부터 찾아 나섰다. 물론 3주짜리 임시 동거인이자 다시 볼 일 없는 여행객의 오지랖일 수도 있으나 나라도 청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너무나 피곤하고 귀찮아서 못 본 척하고 싶었다.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하지 않는 공유 공간 청소를 새로 온 내가 할 필요는 없었다. 심지어 집주인조차 그 어떤 언급조차 없었으니까 나 몰라라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으리라. 다만 잠시라도 내가 머무를 공간이니까. 스스로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일단 청소를 시작했다. 물론 얼마 못가 어마어마한 청소 양에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세탁실 구석에 숨겨져 있다시피 한 진공청소기 등 청소도구를 겨우 찾아냈고 거의 하루 종일 청소를 해야 했다.


우선 초파리 군단을 키우고 있던 은 음식물을 버렸다. 알 수 없는 액체가 흐르는 싱크대 주변도 세재를 활용해 일일이 닦아내고 보이는 족족 쓰레기를 수거해 버리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는 벌레 사체들은 진공청소기를 이용했다. 다행히 청소기 흡입력이 뛰어나 말끔히 치울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은 상상 이상 많이 걸렸지만.


그렇게 시작된 청소와 정리는 집안 구석구석 내 눈이 닿는 곳은 거의 다 해치운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미루고 미뤘던 화장실 청소, 특히 알 수 없는 물질로 막히기 직전인 변기도 새것처럼 청소했다. 물론 청소도구를 찾으며 찾아낸 앞치마 등으로 완전무장해야 할 정도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어쨌거나 번쩍번쩍 윤이 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묶은 먼지와 각종 오염물질들을 걷어내고 치우고 닦고 나니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쾌적해졌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의 하루 일정을 몽땅 바꿔치기 한 청소노동이었지만 뿌듯했다. 집안 분위기부터 달라진 느낌이었다.


청소와 정리를 끝내고 씻고 쉬고 있으니 셰어하우스 메이트들이 속속 귀가를 했다. 집주인 남자나 다른 룸메이트들은 피곤해하며 집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하루가 넘어갔다. 물론 어마어마한 근육통을 남겼지만 뭐,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고 한 건 아니니까 그러려니 넘어갔다.


이후 3주간 머무르면서 최대한 외부에 나가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다 돌아보느라 셰어하우스는 잠만 자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필리핀서 함께 호주로 넘어온 친구들도 만나고 호주에 정착한 예전 대학 선배도 만나고 한국인 친구도 사귀는 등 다양한 일들로 하루하루 신나고 재밌는 추억을 잔뜩 만들었다.


그리고 변화를 목격했다. 셰어하우스 집주인이 어느 순간부터 청소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룸메이트와 밤마다 수다를 떨곤 했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집주인 부인이 원래 셰어하우스 청소나 요리 등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부인이 한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자 집주인은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쓰레기와 벌레 사체가 구석구석 쌓여도 방치했던 것.


어쨌거나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스스로 '청소 요정'을 자청해서 집안 전체를 탈탈 털어버린 이후 집주인부터 남자, 여자 룸메이트까지 방 외의 다른 공유 공간을 청소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덕분에 호주에 머물렀던 숙박시설 중 가장 쾌적한 환경에서 만족스러운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3주 뒤 시드니와 셰어하우스를 떠나는 날 집주인은 내게 보증금을 돌려주며 '고맙다'라고 말했다. 사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 그의 심경의 변화를 짐작할 뿐, 별 달리 마주칠 일이 없었고 대화 나눌 기회조차 없었기에 그의 말이 의외였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본 그의 모습은 첫날과는 다른 얼굴과 눈빛이었다.


분명 처음 봤을 땐 피로에 찌들고 무언가 무방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심한 표정이었던 그가 마지막 날 정산을 위해 만났을 땐 달라 보였다.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고맙다'라고 내게 말을 건넨 자체도 의외였지만 나를 대하는 분위기와 진심 어린 눈빛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사실 몇 마디 채 나누지 않은 건조한 만남과 헤어짐(?)이었지만 어쨌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히려 3주 내내 같은 방을 쓰며 매일 밤 수다를 떨었던 룸메이트와 있었던 시간이나 추억, 그녀에 대한 기억 등은 거의 다 잊혔는데 그 집주인 남자의 마지막 인사와 눈빛만큼은 신기하게도 마음과 기억에 자리 잡았다.


일일이 말로 다 전하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낯선 객 하나가 생뚱맞게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했던 작은 호의가 그와 그 집에 적지 않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쓸 공간이 깨끗했으면 하는 사소한 의도로 시작한 행동이었고 머무르는 동안은 내 집처럼 생각했을 뿐이라 내겐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집주인 남자는 달라졌다. 나중에서야 안 거지만 아마도 부인과 불화로 적잖이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던 듯싶다. 그러다 나의 청소가 사소하고 작지만 변화의 물꼬를 튼 게 아닐까? 이를테면 작은 물방울 하나가 마지막에 바위를 뚫듯이 말이다.


그와는 서로 연락처를 나눌 만큼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스쳐가는 인연이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귀차니즘의 집합체인 내게도 '청소'의 힘과 효과에 대해 체감하고 뿌듯했던 경험이 두고두고 게으른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특별한 일화가 되었다.


청소만큼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쉽고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이 또 있을까?


예전 집은 노후화되고 수많은 짐들로 가득 차서 청소해도 티조차 나지 않는 공간이었는데 이사를 계기로 잡동사니를 버리고 물건이 차지했던 공간을 온전히 비워내고 나니 넓고 쾌적한 공간으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삶의 질이 달라졌다.


오죽하면 공간과 환경의 변화에 대해 농담 삼아 움막에서 궁전으로 집이 업그레이드됐다고 했을까.


저장강박증을 앓고 있던 엄마의 변화, 시드니 셰어하우스와 그 집주인의 변화를 떠올릴 때마다 다시 한번 내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당장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부터 개고 청소와 정리를 미루지 않는다. 복잡하고 어수선해지지 않도록 나의 환경을 자발적으로 통제할 능력과 여력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 밭도 차분히 들여다보고 여유를 가지고 가꿔나갈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늘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가벼운 무기력증이나 우울함, 불안 등으로 내 마음 밭이 어수선해질 땐 일단 청소부터 시작해 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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