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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색 Jun 04. 2022

어느 위선자의 서글픈 변명

착한 척은 그만두기로

나에겐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말하면서 생각하는 나는 충동적이고 기분파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반면 생각이 정리돼야 말을 꺼낼 수 있는 동생은 이성적이고 논리적 판단과 계획 세우기, 정리정돈을 즐겨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 특히 팩트폭력에 일가견이 있다.


어느 날 그 애가 내게 말했다.

"언니 안 착해. 이기적이야. 이젠 그냥 인정하고 편하게 살아."


충격적이었다. 갑작스레 허를 찔린 기분이랄까.


순간 이게 뭐지? 싸움 거는 건가 싶고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몰아쳤다.


처음 감정은 화가 났다. 동생이 대뜸 말로 내뱉은 순간엔 나를 단정 짓고 함부로 평가하는 듯해 욱하는 반발심이 솟았다. 선빵에 케이오당한 듯 잠시 멍해진 채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당황이 곧 부끄러움이 됐다. 어쩌면 속내를 들켜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사그라들자 이성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의문이 들었다. 나도 알아채지 못한 진짜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글로 적으니 기분이 묘하다. 아니 씁쓸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내내 존재론적 의문과 상념들이 몰아쳤다. 아주 오랫동안 삶에 녹여져 있었던 '착한 어린이병' 또는 '위선'일 수도 있는 실체를 마주한 나에겐 쉽지 않은 인정이었으니까.


내 삶의 방식과 가치관, 타인을 대할 때 밑바탕에 깔려있는 태도까지 진심이 아닌 '위선'으로 모두 싸잡아 부정당하는 느낌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드는 한편 뭔가 좀 혼란스러웠다.


혼란이 싫어서 모르는 척 이 주제에 대해 지나치고 싶었으나 아무 일 없던 듯이 무시할 수 없었다.


내겐 기회였다. 물론 지금까지의 나를 전부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겉포장을 다 걷어내고 내가 놓쳤던 것들을 똑바로 볼 기회 말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맞다! 어렸을 때의 나를 떠올려 보았다.


처음엔 맏이로서 혼자된 엄마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었다. 힘없고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키우기 쉬운 착한 어린이가 되는 것뿐이었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랑하는 딸을 위해 사소한 것에도 넘치는 관심과 칭찬을 남용(?)한 엄마의 후한 평가가 거듭되자 어느 순간 '정말 나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확신이 되고 자신감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내 안에 들끓는 인정 욕구를 채우고도 남았다.


착한 어린이는 계속 인정과 칭찬이 고팠다. 그러한 배경이나 원인, 동기에 대해 좀 더 많은 탐색과 직면이 필요하겠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사람이 중요한 관계중심적 성향 때문이었으리라.


칭찬과 인정은 그 어떤 보상보다 황홀하고 중독성 강한 강화물이었기에 기꺼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는 어느 책 제목처럼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누군가의 기대를 알아채면 그에 부응하려 부단한 노력을 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칭찬과 인정을 받는 것이 반복되고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관계에 대한 욕구가 확장되어 어느 순간 제 앞가림보다 타인의 욕망을 우선시하는 오지라퍼가 되었다.


늘 엄마 선생님 어른들 말 잘 듣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실망시키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당장 주어지는 칭찬과 더불어 기뻐하는 그들의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기분 좋았고 뿌듯했고 내가 뭐라도 된 듯 마음이 두둥실 떠다녔다. 그랬다. 나로서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자체가 보람찼다. 감수성 강한 시기에 그러한 내적 만족감은 계속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스스로를 부채질했다.


늘 잘하는 아이이고 싶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앞장서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양보라는 이름으로 쉽게 포기하고 물러서고 언제나 칭찬받을 만한 행동만 하려고 노력했다.


그때문에 모범생이라는 가면이 썩 마음에 들었다.


대신 어떤 욕구들은 억눌러야 했고 거세당한 욕망은 무의식으로 숨어버려 나도 알아채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겪으면서 지나와야 할 시기를 놓쳐 여전히 난 어느 부분 자라지 못한 느낌이다.


키가 크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다양한 관계 속 복잡 미묘한 상황들, 겉과 다른 속내, 이면에 감춰진 진짜 욕망들에 대해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다. 일차원에 머물러 있던 순수함을 벗고 상황을 파악하며 영리하게 행동하려 했다.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그만큼 실망할 거라는 불안 때문에 미리 상대의 기대치 자체를 낮추려는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실망시키느니 애초에 적은 기대로 부담을 낮추려 했던 건지 모르겠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 동안 혼란스러웠는지 계속 헤매었던 것 같다.


열심히 하되 실패했을 때를 대비했고 미리 변명거리를 완충제처럼 밑밥 깔듯 안배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숨 막히게 치열한 1등보다는 적당히 잘하고 안전한 2등이 좋았다. 늘 최선을 다한다고 말해왔으나 안전한 포지션을 찾아 딱 그만큼만 노력했다. 실패가 두려워 늘 변명거리부터 생각하는 겁쟁이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으면서도 도리어 한 발 물러설 만큼 부담감을 못 견뎌했다.


바르고 정직하게 살자라는 당위성에 집착 아닌 집착을 했다. 어쩔 땐 착하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주는 타인의 관심과 반응에 맞춰 마음 없이 그런 척하기도 했으리라. 그래야 얻을 수 있으니까.


당시엔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벽창호처럼 요령도 없고 그저 혼자만의 기준과 고집에 빠져 있었는지도.


그러는 사이 진위는 외면한 채 '착한 아이병'은 중증이 되고 장밋빛 이상주의자의 속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비틀리고 썩어갔던 게 틀림없다.


사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불편하고 기껍지 않고 억울하거나 속상함을 느끼는 순간에도,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을 때에도, 모른 척했을 뿐.


동생의 뼈 아픈 한 마디는 어쩌면 마음이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스스로 매어놓은 고삐와 의무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착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착해야 한다'는 위선과 굴레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말 중에 '착하다'라는 말이 가진 강요와 강제를 이제야 깨닫는다.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 머릿속에 착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매번 스스로 올가 메고 자체 필터링을 하고 자기를 제약하면서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착해야 한다라는 맹목적 믿음 아래 무력하고 어리숙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착한  아니라 쉽게 이용당하고 가벼이 무시당하고 모자란 사람으로 치부되지 않도록 말이다.


상대가 배려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는, 배려할 가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눈치를 봐야 하는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도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다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바보처럼 양보를 미덕이라 믿고 내 것을 내주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받지 못하고 빼앗기기만 해야 하는 그런 이용하기 쉬운 착한 존재가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존중과 배려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현명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참 어렵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사람인지.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봐도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럼에도 착한 아이 병에서 졸업할 때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음에도 없는 양보나 위선이 아니라 솔직하게 자신의 욕구와 바람을 인정하고 표현하고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과 합의하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말이다.


나에겐 여전히 숙제가 남아있다.


상대에게 착하게 바르게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그 욕구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왜 그렇게 타인의 평가와 의견에 지나칠 정도로 의지했던 걸까?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으면 나는 나를 인정할 수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나 여전히 많은 의문들에 휩싸여있다.


해결해야 할 의문은 아직도 산적해 있고 계속 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포기하지 않고 솔직하게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하다 보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결국 속시원히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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