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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토마토 Oct 12. 2023

언니와 중앙동 사십계단을 걷고 싶네요.

같이 글을 썼던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는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블로그에 글을 써봐, 우리 블로그 이웃 맺자.

엄마들이 육아일기쓰는 앱이야, 나랑 친구 맺고 같이 일기 쓰자.


나는 그 언니의 제안에 처음에는 솔깃했다가 아기 때문에 잠을 설치고 끼니를 대충 때우고 나면 의욕이 없어지곤 했다. 며칠이 지나면 언니는 또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쓴 일기 봐봐, 이번에 가족여행 갔던 이야기인데 한번 읽어봐.

이번 블로그에 부산 중앙동 사십계단 다녀온 이야기 적었어. 그리고 독립서점 다녀온 이야기도 적었는데 네가 부산에 오면 같이 가고 싶더라.


졸리는 눈을 비빈 채 블로그에 접속하면 어김없이 아기띠를 매고 어느 햇살 좋은 계단이나 골목에 서 있는 언니의 뒷모습이 있었다. 아니면 꼭 언니의 모습이 없어도 언니가 찍은 풍경이 있었지. 그 풍경 너머에 있을 언니의 향기가 느껴지는.


그럼 나는 다시 잠시 블로그에 짧은 글을 쓰고 일기 앱을 열어 그날의 육아일기를 끄적였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글에 호기심을 가졌고 글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게으른 글쟁이지만. 글을 쓰고 나누며 늦은 나이의 육아의 시간도 그럭저럭 넘겼다.


언니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글을 좋아하지만 글을 게으르게 쓰는 나에게 부지런한 글쟁이의 모습을 선물처럼 보여주는 사람.


그랬던 언니는 지금 세상에 없다. 그녀의 마지막 육아일기에는 첫째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장점이 너무 많은 oo이. 있는 그 자체로 사랑한다.


아마 암으로 죽기 전 있는 힘을 다해 쓴 마지막 일기였을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블로그에는 뭔가 쓸쓸한 부산 여행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 떠난 마지막 여행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사연도 알지 못한 채 그녀의 부고를 접했다. 그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철없이 이백자 원고지 틀에 쓴 서툰 소설을 몇 번 보낸 적이 있었다. 언니는 그 서툰 소설도 기꺼이 읽어주었다.    


그녀는 수십권의 일기를 두 아이에게 남기고 떠났다.

그녀가 떠난 지 이 년이 지났다. 나는 그녀가 떠난 뒤 이백자 원고지 틀이 아닌 A4용지에 소설을 쓰고 있다.


언니는 하늘에서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을까? 언니의 눈으로 보던 세상, 그리고 그 글들이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나는 언니가 썼던 블로그와 일기를 다시 찾아 읽어보며 오늘 내가 사는 이 삶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더 늦기 전에 언니가 사랑했던 중앙동 사십계단을 걷고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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