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소주를 먹지 않은지 아주 오래됐다. 어렸을 때는 무한대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해 준 술이라는 녀석이 좋았다. 딱딱한 세상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는 술이라는 녀석에 의존해보려 했던 적이 있었다. 길지는 않았다. 스무 살을 맞이하고 대략 반년 정도, 마신 소주가 화장실 변기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들이부었다. 앞에 앉은 친구 놈과 누가 더 많이 마시나를 경쟁하며 이기지 못할 술을 이긴 척해보기도 했다.
당시 가장 많이 마신 날은 친한 형과 둘이 앉아서 14병을 마셨던 적도 있었다. 나의 주량도 모르고 들이붓던 술이 싫어지기 시작한 건, 버려야 했던 속뿐만 아니라, 다음 하루 때문이기도 했다. 유독 술만 먹으면 다음 하루가 개운치 못했다. 워낙 많이 마시던 버릇이 있던 터라 술을 많이 누웠다가 고개만 들어도 토할 것 같고, 물만 먹어도 토할 것 같은 그 기분이 싫어졌다.
술이라는 놈은 결국 마실 때는 좋지만, 이틀이라는 치명적인 시간을 앗아간 후에야 치료가 되는 아주 악독한 병 같았다. 지금도 마셔야 할 자리에서는 어떤 누구라도 대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맥주를 제외하고는 일절 마시지 않는다. 이제는 맥주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술은 정신력으로 마시는 거라며 한 잔만 먹고 얼굴이 빨개지는 친구 녀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20살 꼰대 같던 모습도 이제는 후회로만 남는다. 세상이 빙빙 돌면서도 손가락 끝까지 온 신경을 집중하고 표정 하나 하나와 말투 하나하나를 조심하며, 술을 마시기 전 보다 더 멀쩡해 보이려고 노력했던 가엽던 술버릇도 거침없이 버려야겠다.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맥주를 내가 즐겨했던 이유는 맥주가 주는 '휴식'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냉장고 문을 열어 거품이 흘러나오는 맥주캔에 입을 맞추면 피로가 모두 가시는 듯했다. 진짜 술에 맛도 모르고, 단지 그 '휴식'을 취한다는 제3의 눈의 이미지만 갖고 싶었다. 일과를 마치고 맥주가 목젖을 타고 꼴딱하고 내려가면 이제 나는 외출을 하지 못할 공식적인 핑계를 완성하곤 했다.
이제 차를 타고 이동할 수도 없고, 약속을 잡을 수도 없으며, 그 어떤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해도 '술김'이라는 방어벽에 숨을 수 있었다.
혼자 궁상맞아도 그럴듯했고, 일찍 잠에 들어도 그럴 수 있었으며, 늦게 잠에 들어도 괜찮았다. 슬프면 슬프구나, 좋으면 좋았구나, 나의 자아를 술에 숨기는 좋은 방패 백이었던 맥주였다. 술을 마시면 깊은 잠을 자는 듯하고 생생한 꿈을 꾸기도 한다. 슬슬 변질된 '휴식'이라는 이미지에서 '수면제' 혹은 '꿈을 꾸기 위한 쓴 약' 정도로 의미 없는 맥주를 넘기는 일이 반복됐다.
오늘로 그런 맥주를 '당. 분. 간' 끊으려 한다.(솔직히 완전히 끊겠다고 다짐을 해도 안 될걸 알기에 줄이겠다.)
거의 인생에서 내가 위로받던 거의 유일했던 나의 아이템을 끊음으로써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 더 놓는 샘이 됐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인생이라는 것을 지속할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려놓는 일들이 많아진다.
사람 간의 이별이나 살았던 공간, 시간, 물건, 기억 등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 놓아버렸던 것들은 나에게서 소중한 것들이었다. 다만 그것을 놓을 때마다 의식하지 못하고 놓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중, 내가 좋아하는 것 중 내가 의식을 하고 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들은 나에게 정말 좋은 것들일까?
짝사랑을 포기하는 일은 슬프지만 필연적이어야 하고 빨라야 한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만큼, 상대도 그만큼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 나만 좋아하기 때문에 놓지 못하면서, 상대로부터 상처를 받는다면, 더욱 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맥주를 나는 너무 좋아하지만, 맥주는 나에게 그만큼의 보답을 해주는 녀석은 아니다. 되려 나를 망가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원함과 '휴식'이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나를 꾀어 나를 조금씩 망가 트리는 것과 같다.
핸드폰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문뜩 지난주에 자랑스럽게 찍어둔 캔맥주 사진이 발견됐다. 물론 이미 모두 사라진 지 오래지만...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것들이 아니라면, 하나둘씩 정리해 가자.
나 혼자 좋아하는 것들은, 그것들이 가끔 나를 몹시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겨왔다. 그것들에 의해 스스로 망가지는 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위하는 것들만 남겨가자. 남기고 남기고 정리하고 정리하다 보면 진짜들만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