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이름

플로리스트 이야기 0.

by 블루라벤더

2017년 여름 한가운데.


커다란 칠판 가득히 재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럭셔리한 작업대 위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꽃들이 있다. 노트에 부지런히 펜을 놀린다. 사실 별 상관은 없었다. 그게 5번가였든, 카푸치노였든. 내게는 그저 희미하기만 한 존재감 없는 연보라 장미였고 개인작업이었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갈색이 도는 세상 희한한 색깔의 꽃이었으니까. 혀가 꼬이는 긴 이름 '아스클레피오스'도 머릿속에는 건드리면 유액이 나오는 '잘잘한 꽃'으로 입력됐다.



어떤 것이든 내겐 그저 관리법을 배우고 작품을 완성해야 할 대상 혹은 목표일 뿐이었다. 배워야 할 것들만 어서 배우고 빨리 학원을 수료하고 그 다음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나를 증명하고. 급한 단어들만 머리에 가득했다.

그리고 교만하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해석하면 ' 이런 힘든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였던 것 같다.



2022년. 코로나로 뒤덮인 봄. 흔히 말하는 제대로 된 커리어가 시작된다는 경력 만 5년을 넘긴 플로리스트. 꾸역꾸역 내 샵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소화 불량을 달고 산다.



약과 함께 식사 후에 한 시간씩 걸으라는 의사쌤의 처방에 따라 2시부터 한 시간을 공식적으로 쉰다. 작업을 하다가 시간을 넘겨 계획된 시간을 못 채우는 경우도 있지만 직장인들이 다시 오후의 일을 시작하고 엄마들은 슬슬 아이 간식을 준비하는 시간. '쥔장 휴식'이라고 고딕체로 프린트한 안내글을 유리문에 딱 붙이고 조용히 가라앉은 동네 탐험을 나선다.


즉석 떡볶이에 와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식당도 있고 Chausson au pomme를 기가 막히게 하는 빵 가게도, 정말로 애정 하는 꾸덕꾸덕한 쿠키를 굽는 과자점도 알아냈다. 만화방처럼 방방이 나누어진 공간 사이에 사다리까지 놓여있는 아담한 도서관과 샌드위치에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호젓한 점심을 즐길 수 있는 나무가 있는 공간도 발견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골목 사이사이에서 이름이 알고 싶은 예쁜 꽃들을 보게 되었다. 사진도 찍고 꽃 검색을 한다. 외우기위해 한 참을 들여다 본다.



다리를 다쳐 석 달로 예정되었던 수업을 다 채우지는 못하셨지만 한눈에 봐도 고수였던 학원쌤의 첫 수업 첫 가르침은 '주의 깊게 관찰하라'였다. 지금도 잘 따르고 있다. 어슬렁거리며 걷는다. 먼저 눈에 들어온 휘어진 가지가 멋진 이 녀석은 프렌치 스타일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커다란 브로콜리 같은 저 나무는 볼륨 내기에 딱 맞다고 생각한다. 인테리어 잡지를 볼 때면 손에 펜을 들고 메모해 가며 공부를 하고 그 잘생겼다고 소문난 남자 주인공 대신에 의상과 매치된 화려한 꽃들을 초 단위로 화면 멈추어 분석하며 브리튼 시리즈 하나를 끝냈다.


내게 꽃의 이름은 블로그나 수업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뒤적여서 정확한 단어가 나오면 다행이고 검색을 해도 없고 시장에서 받아온 영수증에 쓰여진 막강 흘림체도 해독할 수 없으면 그냥 내 스타일대로 기록했다. 장미. 노란 스프레이. 단지형. 번개형 코어. 톱니형 꽃잎. 뭐 이런 식으로. - 산토리니 장미를 묘사하는 단어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싱싱하냐 관리하기는 용이하냐였다.


그러다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가진 아름다움이. 귀여움이.강인함이. 그리고 이름이 궁금해졌다.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모으는 사람이라고 김영하 님이 말했었다. 그분의 핸드폰 메모장은 아마 햄버거 버튼이나 피자 세이버 같은 것들로 채워지고 있을 거다. 내 핸드폰에는 종지 나물이나 돌단풍, 참마리가 사진과 함께 저장되어 있다.


강남의 비싼 학원이 실력있는 플로리스트가되는 확실한 보장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쌓이는 경험이 마침내 컵에서 넘쳐흘러야 일정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했다. 습관처럼 하는 관찰도 공부도 다 컵이 빨리 채워지기를 바라는 급하게 쏟아붓는 물줄기일 뿐이었다. 이제는 경험의 길이 만큼 깊이 또한 중요하다는 걸 안다. 짬, 내공 혹은 인내가 필수다. 왜냐면 인별에서 본 예쁜 포장 법도 흉내만 낼 수 있지 결코 똑같이 되지 않으며 꽃시장에서도 찾기 힘든 사진 속의 이름 모를 열매도 결국에는 내가 찾고 또 찾아야 어느 날 비로소 눈앞에 나타나니까.


아침저녁으로 다니는 집 주변에서 옥잠화, 애정목을 찾았다. 그리고 봄이면 어서 꽃시장에 진열되기를 기다리는 산당화가 20년 넘게 살고 있는 아파트 화단 가장자리에 해마다 이맘때 늘 볼 수 있었던 가시 달린 붉은 꽃이라는 것도 깨달았고 오늘에서야 이번 주 샵 냉장고에 있는 꽃의 80퍼센트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한 친인척 꽃들이란 걸 알았다. 이런.


찬찬히 오랫동안 지켜보고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는 만큼 제대로 된 플로리스트가 될 거라는 믿음이란 표지를 가진 나란 사람의 단어장엔 욱하면 나오는 세고 높은 텐션의 사투리 구역과 더 급하면 나오는 거친 욕의 섹션도 있지만 예쁜 이름으로 채워지고 있는 플라워 영역 또한 있으니,


​괜찮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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