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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풍경 Apr 04. 2022

나쁜 기억의 쓸모

방어기제 '억압'-창작동화 '한밤 중 달빛 식당'리뷰


집을 나왔어. 길은 어둡고 갈 데가 없었지.


    삶이란 불편함의 총체입니다. 평안함이란 순간적으로 때마다 주어지나 인생에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보장 되지를 않지요. 하지만 가장 불편한 곳에서 인간다움은 빛나고 진가를 발휘하기에 아이러니 하달 까요. 죽지 않을 정도의 시험은 그저 그런 한 존재를 성숙함의 단계로 이끕니다. 잎사귀를 비비기 전에는 확실한 향을 뱉어내지 않는 허브처럼,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치약 튜브처럼, 적당한 압력으로 쥐어짜고 비벼대야 인생은 알싸하고 쓸모 있는 것을 뱉어 내어 놓습니다.  창작소설 '한밤중 달빛 식당'은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소년과 아버지가 상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판타지와 성장소설의 요소를 빌어 직관적으로 그려낸 수작입니다.


한밤중 달빛 식당/이분희/비룡소/2018.03.15.


망각과 회피가 실은 평안이 아니라 형벌이 될 수도 있음을 이 작품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귀띔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는 성숙의 지혜를 잘 풀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어른들에게도 필요한 깨달음이기도 하기에 아이들만을 위한 동화가 아니라고 여겨지네요. 잊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마주해야만 하는 슬픔이 있음을. 아니 그저 그렇게 덮어놓는 것으로는 절대 되지 않을, 끝내는 맞닥뜨려야만 하는 슬픔의 종류도 있음을 전해주는 작품이지요.






| 엄마의 죽음, 남겨진 연우 부자


     주인공 소년 연우는 집을 뛰쳐나와 하염없이 밤길을 걷습니다. 술주정하는 아버지와 엄마의 빈자리만큼 싸늘한 집구석의 허전함을 피해 무작정 걷다가 언덕 위에 동그마니 자리한 달빛 식당에 이르는 것이 책의 시작이지요. 마법 같은 따스한 음식과 말도 안 되게 다정한 여우 부부가 주인인 식당은 음식값으로 나쁜 기억을 받습니다. 소년은 반 친구의 돈을 도둑질한 기억도, 그 돈으로 새 실내화를 산 기억도, 저를 두고 하늘나라로 떠나 간 엄마에 대한 슬픈 기억도 음식과 맞바꾸지요.



     연우 아버지는 술독에 빠졌습니다. 제 아픔에 몸부림치느라 돌봄 받아야 할 아들의 슬픔은 미처 생각도 못 했다지요. 배우자의 부재와 상실의 충격을 잊을 수는 없으니, 술의 힘을 빌려 정신줄을 부러 놓았고요. 회피하면 어떻게든 버티는 거라 착각했지만, 가슴은 부서지면서 그와 그의 아들의 매일은 조금씩 모퉁이부터 깨져 나갔어요. 바스러지는 생활의 형태는 종국에는 제 자식 놈도 잃게 만들 파국인 줄 모르고 말이지요. 가장 보호받아야 할 연우의 울타리가 되어줘야 할 아빠가 죽음과 씨름할 기운이 없어 그저 알코올에 잠기는 동안 연우는 하나, 둘씩 나쁜 기억과 달빛 식당의 음식을 바꿔나갑니다. 슬픈 기억이나 아픔은 그저 잊는 게 약일까요?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된다면 소년의 마음은 괜찮아질까요?




| 방어기제: 아들의 억압, 아버지의 부정


    인간의 정신은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의식적, 무의식적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이는 정신분석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의 기본이 되는 중요 개념이에요. 방어기제는 부정, 분리, 취소, 억압, 억제, 회피, 전치, 투사, 합리화, 주지화, 반동 형성, 동일시, 퇴행, 승화, 유머 등, 제가 나열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베일런트 George Vaillant 는  성숙함의 정도에 따라 이들을 분류하였습니다.



억압

자아를 위협하는 소망이나 충동을 의식으로부터 무의식에 두는 것(그 목적을 달성 가능한 상황이 될 때까지 일시적으로만 잊는 것)이며, 따라서 의식되지 않은 채 그것들을 보관 유지한 상태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상정되는 자아의 방어기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억눌린 소망과 행동을 그림자라는 원형에 포함시킨다.




부정

위협적인 현실에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불안을 방어해보려는 수단이다. 가장 원시적인 방어기제이다.




행동화

자신의 억눌린 고통을 행동을 통해서 표현하는 감정 해소의 한 방법이다. 이것은 투사와 함께 미숙한 방어기제로 분류된다. 특정 행동을 외부로부터 금기당했을 때나, 개인이 내적 갈등이 있을 때 일어난다.


-위키백과-

 

 

    보통 승화, 유머 등은 성숙한 방어기제로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작품 전반부의 연우 부자의 반응은 성숙하지 못한 방어기제 축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연우는 달빛 식당에 엄마의 죽음과 친구의 돈을 훔쳐 실내화를 산 나쁜 기억을 주고 음식을 사 먹습니다. 기억을 달빛 식당에 넘겼기에 그 나쁜 기억으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 죄책감과 불안 등의 감정 역시 느껴지지 않지요. 부정적인 정서는 불필요한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속삭여 주며, 통념과 다르게 이성보다는 감정이 선택과 행동의 결정에 기여하는 바가 큽니다. 때문에 연우가 달빛 식당의 냉동고 안쪽의 보관 용기 속에 밀어 넣은 것은 비단 나쁜 기억이 아니라 저의 양심과 판단의 저울추를 저당 잡힌 것과 같달까요.



      억압이 기억과 감정, 충동을 의식의 너머로 밀어내어 아예 욕망하지 않게 되듯, 연우는 엄마의 죽음을 잊어서 서러움과 그리움을 채우려는 몸짓을 멈추지요연우 아빠는 알코올의존 환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현실을 회피하고 고통을 부정하는 심리기제를 보입니다. 결국 행동화의 일종으로 알코올에 취해 슬픔을 분출하고 잊어보고자 하지만, 아들도 아버지도 저희들의 시간만 붙들어 둔들 세상은 멈추지 않기에 결국 '상황' 맞닥뜨리고야 맙니다. 쉽게 풀이해 미숙한 방어기제를 미숙하다고 일컫는 이유는, 결론적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이롭지 않은 방식의 대처법이기 때문이거든요. 연우와 아빠는 그리고 달빛 식당의 단골인 넥타이  아저씨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어기제로 마음의 구멍을 땜질한 대신 무엇을 잃었던 걸까요?



왜죠?
나쁜 기억들이 없어지면 행복해야 하잖아요?
어제  아저씨를 아침에 봤어요. 그런데...
그런데 너무 슬퍼 보였어요.



|   나쁜 기억의 쓸모



그러자 붉게 충혈된 아저씨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후드득 흘러내렸어. 눈물방울이 탁자 위에 떨어지는 순간, 차디찬 구슬 얼음으로 변했지. 속눈썹 여우는 그걸 조심스럽게 접시에 담으며 말했어.

"아주 예쁜 기억이 들어 있군요."

"그것조차도 이젠 나에게 나쁜 기억이오. 딸꾹!"



그런데 아저씨는 아까와 많이 달라 보였어. 표정 없이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는 그 모습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지.


-한밤중 달빛 식당 본문 중



     연우는 반 친구의 도둑질에 대한 추궁에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정신을 잃습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지요. 그리고 정황 상 중요한 것들을 저가 스스로 놓아버린 것을 알았어요. 연우는 나쁜 기억을 아주 많이 음식과 바꿔 먹었을 넥타이 아저씨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게 되고, 공허한 아저씨의 모습에서 오히려 절절한 슬픔을 느꼈지요. 더 이상 슬프지 않지만 텅 비어 버린 그래서 진정 슬픈 넥타이 아저씨를 보며 더 이상 늦기 전에 선택하기로 해요. 나쁜 기억을 도려낼수록, 슬픔에서 멀어질수록 되려 인간다움과 인간다워질 성숙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삶을 살아나가게 하는 동력 중 하나가 욕구 충족이라면, 상실 극복이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성숙을 향한 뜀박질의 발 구르기 단계랄까요. 상실과 슬픔이 전무한 인간은 뜀틀대 앞의 발구름 판이 없는 것과 같아서, 잘 지내는 듯하면서도 크게 발 굴러볼 일 없어  넥타이 아저씨처럼 삶이 허허로울지도 모릅니다.  



「한밤중 달빛 식당」, ⓒ 윤태규 삽화



   그래서 연우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로 했어요. 달빛 식당으로 찾아와 기억을 되찾겠다는 연우의 요청에 여우 부부는 그동안 소년의 눈에서 흘러내려 빚어진 얼음조각을 갈아 음료를 만들고, 소년은 음료를 삼킵니다. 이러한 절차는 연우가 엄마의 죽음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 일련의 애도 과정을 통해 그 슬픔이 소년의 성숙의 요소가 되리라는 기대를 독자에게 불러일으키지요. 소년의 용기를 바라보는 여우 부부의 눈빛은 다정하고 부드럽습니다.


     나쁜 기억을 잃어버려서 나아갈 방향과 길도 잃었던 연우네는  바를 찾습니다. 아들의 잠깐의 기억상실과 "엄마는 어디 있어?" 하는 순진한 눈빛의 질문에 연우 아빠는 소스라치게 놀라 술병을 내려놓습니다. 달빛 식당은 사라지고, 소년의 기억은 돌아왔습니다. 소년의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도 돌아왔지요. 역시 슬프고 아픕니다. 그러나 소년과 아비는 상실을 인정한 만큼 서로를 마주   있게 되어 나란히 걷고, 저녁식사 메뉴를 주제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둘만의 가족 식탁의 풍경을 그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집을 나왔어. 길은 어둡고  데가 없었지"라는 먹먹한 문장으로 시작한  작품은, 연우와 아빠  존재가 서로에게 기대어 집으로 향하는 따스한 이미지로 결말을 맺습니다.





| 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걸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방어기제와 성숙하다 보는 방어기제의 차이는, 어쩌면 나의 정신을 불편하게 하고 위기감을 주는 상황과 감정을 품어내어 사회에서 용인되는 방식으로 풀어내느냐, 받아들이지도 마주하지도 못해 튕겨내든 피하든 되던지거나 하는가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받아들이느냐, 뱉어내느냐 만큼의 차이. 잊는 것이, 망각이 도움이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걸요. 나쁜 기억은 아픔도 주지만 기회도 줍니다. 판단하고 선택할 기회, 변화할 기회, 반복하지 않을 기회, 새로워질 기회. "잘못되었다"라는 신호이니까요. 필요하다면, 달빛 식당의 냉장고 깊숙이 무의식 너머로 나쁜 기억을 밀어놓는 것도 괜찮겠지요. 당장 마음이 부서져 버릴 듯하다면 말입니다. 허나 처음 시작은 그렇더라도 시간의 도움으로 마음이 여물어져서 발 구르기를 해볼까 싶다면, 연우처럼 용기를 내보는 것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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