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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풍경 Oct 01. 2022

안정화 기법, 그라운딩 ② - 진정형 그라운딩

양양 그림책 "계절의 냄새" 북리뷰


그라운딩은 당신을 현재와 현실에
 "정박시킵니다"

Lisa M. Najavits, 안전기반치료, 하나의학사, 177p.





   우리가 기억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기록들은, 편집되고 왜곡된 기록입니다. 100프로 객관적인 현실의 복사판이 아니라, 인지의 틀을 거쳐 가공된 이야기라 할 수 있지요. 이것은 인간의 뇌가 진화한 결과입니다. 뇌신경망은 무분별하게 뻗어나가기만 하지 않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조직화됩니다. 현실에 가장 효율적으로 반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최적의 회로를 갖춰 나가고자 가지치기를 해나가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신경망 중 어떠한 자극에 대한 회로는 선택되어 8차선 고속도로 마냥 탄탄하게 뻗어나가고 확장됩니다. 반면 불필요하다 여겨지는 회로는 지워집니다. 남아있다고 해도 빈약한 시골의 오솔길 수준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쉽게 말해 유년기 축적된 경험과 자극이 데이터가 되어 한 인생을 지배할 뇌의 시스템을 조직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특히 뇌의 가지치기가 활발히 일어나는 생애 초기의 경험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트라우마 상황에서 어린 시절 따뜻하고 신뢰로운 경험을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치료 예후 차이는 큽니다. 그렇기에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단서를 기억 저장고에 가능한 많이 축적해 놓는 것 또한 중요하고요. 사용할 내적 도구가 빈약하면 정신질환과의 싸움은 더욱 힘겨워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진정하기 위한 자원이 제법 갖춰져 있다면, 고통스러울 때 그라운딩 기법을 사용하기를 권합니다. 그라운딩 기법은 말하자면 현재의 고통에서 환자가 거리를 두고 현실감을 찾도록 돕는 기법입니다. 이를 통해 환자는 고통에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균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기법은 특히 PTSD와 물질남용 장애 치료 시 효과적입니다. 다만 이 기법이 익숙해질 수 있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좌) 한여름                                                                                      (우) 가을x



   아래에 정신적, 신체적, 진정형 그라운딩 중 진정형 그라운딩의 요령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대로 시도해도 좋지만, 꼭 같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자신만의 특효한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좋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형 그라운딩을 사용할 때에 나만의 요령으로 나의 자원을 사용해 보시면 어떨까요. 평소에 그렇게 하기 위한 준비물을 차나 사무실, 집 등 가까운 곳에 두도록 하세요. 이 진정형 그라운딩의 요령을 알아놓으면 감정적 혼란 상태가 임했을 때에 유용할 것입니다.




진정형 그라운딩 

자신에게 매우 친절하게 말하는 것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친절하게 말하세요.


-가장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세요


-당신이 아끼는 사람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세요


-당신의 기분을 더 낫게 만들어주는 시, 인용구, 영감을 주는 노래 관련 단어를 기억하세요


-안전 장소를 기억하세요. 자신만의 진정감을 주는 장소를 서술하세요.

소리, 색깔, 모양, 물건, 질감.


-대처 문장을 말하세요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어."

"이 기분은 지나갈 거야."


-자신을 위한 안전한 선물을 계획하세요.

사탕 하나, 멋진 저녁, 따뜻한 목욕


-다음 주에 있을 즐거운 계획을 생각하세요.

친구 만나기, 영화 보기, 산책


-Lisa M. Najavits, 안전기반치료, 하나의학사, 179p.






자신만의 방식 만들기



저만의 그라운딩 방식을 소개합니다. 바로 산책과 기록의 습관인데요. 산책이란 저에게 스스로에게 매우 친절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한 장치를 점검하고 채워 넣는 정비의 시간이기도 하지요. 산책이 여의치 않아 초록의 사진을 띄운 모니터 앞이라도 찾아야 할 순간을 예비하는 과정이자 그 자체가 내 나름의 그라운딩 연습이기도 하고요. 저는 산책하며 카메라로 소리, 색깔, 모양, 질감을 채집하고 사진과 맞닿는 단어와 노래, 시들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좌) 초여름                                                                                       (우) 겨울


   산책을 하며 엿본 세상의 면면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 루틴이 되었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어요. 먼 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같은 장소 다른 계절의 컷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분명 동일한 장소인데 계절과 시각에 따라 기록에서 읽히는 정서가 같지 않습니다. 특히 촬영이 습관이 되며 알게 된 것은, 카메라 렌즈가 사람의 눈을 따라잡지 못하는 때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감탄하여 셔터를 눌렀건만 화면에 출력되는 장면에는 분명 담아내고자 했던 서정성이 없습니다. 카메라와 렌즈 기계의 우수함, 2차 가공을 통해 눈으로 직관하는 풍경을 뛰어넘는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시선이 담아내는 서정을, 렌즈가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면 왜일까요. 시선이라는 한자어에 담긴 뜻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요.


촬영을 하는 시선과 피사체 사이의 어느 지점 즈음, 의미는 피어난다.


    시선 視線 은 '눈이 가는 길', '눈이 가는 방향'을 뜻합니다. 방향이 있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점에 시선의 주체인 사람, 정확하게는 한 영혼이 존재합니다. 그는 방금 제가 접한 한순간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사각의 틀에 담아내기로 결정한 참입니다. 셔터를 누르게 하는 마음의 선택이 특정한 정서의 빛깔을 띠고 한 방향으로 뻗어나갑니다. 그 끝에는 피사체가 있습니다. 사진은 촬영하는 사람과 피사체 그 중간 어디쯤,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피어납니다. 아마도 촬영의 행위가 결정된 최초의 시작점에서 거리가 멀어질 수록, 서정성이 옅어지는 사진이 나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저의 모든 사진은 당연히 스냅 촬영입니다. 공들여 초점을 맞춘 것보다 마음이 찡하니 울린 순간 바로 셔터를 누른 컷이 오히려 좋을 때가 많습니다. 그중 특히나 내게 특별한 선물이 될 만한 장면들은, 따로 저장해 바로 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내게만 의미 있는 풍경일지 모르나, 혹여나 누군가는 그 한 컷에 위로를 받을지 몰라서 인스타그램 공간을 통해 공유합니다. 누구에게 닿을지, 어떤 감흥을 전할지 알 수 없지만 SNS 상에 공유하는 전시 행위 자체도, 제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소통과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며 잘 일궈나가겠다는 다짐이자 진전을 위한 행동입니다. "나눔, 공동체, 헌신." 제게는 스스로를 보살피고 존중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당신의 삶을 진전시키는
하나의 행동에 헌신하라. 
헌신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을 존경하고 명예로이 여기며 
스스로를 보살피는 방법이다.
Lisa M. Najavits, 안전기반치료, 하나의학사, 181p.



동일한 장소이지만 두 장의 사진 사이에는 1년의 시간차가 있다.





단서 채집의 다른 예 

그림책 [계절의 냄새]


양양, 계절의 냄새, 노란상상, 2021.03.26.

  양양 작가의 그림책, 계절의 냄새는 누군가의 추억 저장소이자 안전 기지로의 피신을 돕는 단서들의 집체 集體입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체로 진행됩니다. 읽다 보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후다닥 집으로 뛰어들어오는 동시에 꼭 쥔 주먹손을 풀며 특이한 풀이나 돌 따위를 엄마에게 자랑하느라 바쁜 우리 아이들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요. 그렇게 아이는 수집한 냄새를 함께 맡아보자며 우리를 초청합니다. 아이가 풀어놓은 냄새는 저에게 특별한 순간으로 남았던 계절마다의 사건과 얽혀있습니다. 첫 등교, 봄 꽃잎, 친구와의 인사, 고양이를 따라 올라간 다락의 신비로운 느낌, 할아버지의 집 마당에서 느꼈던 알싸한 여름밤공기, 아팠던 상처의 냄새, 낙엽 냄새와 귤껍질의 향기, 막 귀가해 나를 안아주는 아빠의 코트 깃에서 느껴지는 겨울의 냉기와 냄새. 계절감이 깃든 에피소드와 당시 아이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냄새가 연합하여 특별한 컬렉션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제 아이는 수집 목록에 있는 향기를 접할 때 자연스레 그에 얽힌 추억과, 당시에 느꼈던 정서를 보다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위안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집무실의 서랍에 오렌지 향의 에센스 오일을 챙겨놓거나, 차량의 글로브박스에 알싸한 여름밤이나 아빠의 코드깃에서 풍기던 향기를 떠오르게 하는 향수를 챙겨놓을 수도 있겠지요.  




   여러분에게도 있으시다면, 나만의 목록을 만들어 보시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합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편안함을 불러일으키는 향기가 있는지 찾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반드시 후각 정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소리, 맛, 촉각과 자신의 취향.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면 됩니다. 그라운딩 물질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방법입니다. 끈이나 실, 천 조각, 장신구나 돌 등 언제든 불안이 올라올 때 만질 수 있는 작은 것이면 됩니다. 풀어놓기 민망하지만 극내향성에 대인 불안이 심했던 저는 어린 시절, 애착 인형의 털을 뽑아서 아주 작은 털공을 만들어 주머니에 숨기고 다녔습니다. 초조해지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만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신에게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컬렉션을 완성해 보시는 것 어떤가요?



*이 글은 아래 책, "감정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그라운딩 사용하기" 부분을 참고하였습니다. (176~181p.)

Lisa M. Najavits, 안전기반치료, 하나의학사, 201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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