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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Aug 27. 2024

사찰에서는정숙해야한다지만,제직장생활은우당탕탕인걸요

5화_복덕을 받지 않는 이유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우고 이를 널리 보시하고, 또 어떤 보살이 모든 법에는 '나'라고 할
실체가 없음을 알아 참다운 지혜를 성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지혜를 성취한 보살의 복덕은 수많은 칠보를 보시해서 얻는
 사람의 복덕보다 훨씬 클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런 보살은 실로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소개받은 사람은 주방의 마에스트로, 공양간 보살님이었다. 공양주 보살님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두 사람에게 전해 들은 바 있다.

 첫 번째는 면접을 진행하던 스님이었고, 두 번째는 선임자에게서였다. 선임자는 내가 오기 전 이미 퇴사한 상태라 전화상으로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가 조언해 주실 만한 것이 있으실까요,라고 물었더니, 통화가 끝날 때까지 공양주 보살님을 대할 때의 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땐 공양주보살님이 보통 성정이 아닌 것 같아 괜스레 걱정이 들었다. 이 분은 어떤 분이실까.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작은 키에, 단발머리, 60을 넘은 연세의 보살님. 함께 공양을 준비하며 나는 왜 스님과 선임자가 걱정 섞인 당부의 말을 전했는지 어림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말투 때문이었으리라. 어르신 특유의 타박하는 듯한 말투에, 꽤 많은 이가 상처받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보살님의 말투가 우리 엄마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런 말투엔 통달한 나.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다른 쪽이었다. 






사람과의 관계, 특히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관계가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내가 삼십 대 중반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일찍이 스무 살 초반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전까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충이었다. 어쩌면 되려 어린 탓에 그런 미묘한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의 어려움이란 그저 육체의 피로, 적은 월급 정도였달까.



삼십 대 중반이 돼서야 나는 사회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쉽게 말하면 두 가지의 스타일이 있는데, 아홉 번 안 도와주다가 한번 도와주는 사람과 아홉 번 도와주다가 한번 못 도와주는 사람. 그중에 나는 후자에 속했다. 그런데 늘 보면 아홉 번 도와주는 것이 독이 되었다. 못되게 굴다가 한번 잘해주는 것이 더 나은 모양이었다.



내 고충을 들은 벗은, 너무 잘해줄 필요도, 너무 못되게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만약에 둘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자라리 못되게 굴다가 한번 잘해주는 게 낫다라고 조언해 주었지만, 나는 그것이 참 어려웠다.

 내가 행하는 도움에 상대가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해 주면 그걸로 되는데, 어느 날 한번 도와주질 못하니, 왜 안 해주냐고 성을 내는 것이 아닌가. 그럼 애초에 도와주면 안 되었던 것일까. 이런 계산을 해야 하는 삭막한 사회라니 숨이 턱 막힌다.



벗이 나에게, 모두 너와 똑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나 스스로도 너무 세상을 긍정적이고 아름답게만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을 도와주고 남의 도움을 감사하게 받는 세상. 호의를 마음껏 베풀어도 상처받지 않는 세상. 남을 돕는 것이 호구가 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을 바라는 내가 오히려 도태되어 가는 기분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자, 문득 경계해야 할 것은 당연함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함. 다른 이가 나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었을 때 당연히 그 사람이 고맙게 생각하겠지 라는 마음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

 


"수보리야, 보살은 아무리 큰 복덕을 지었다 해도
그 복덕을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아아, 그러나 부처님. 저는 한낱 중생이라, 나의 베풂을 고마워하지 않고, 나의 선행을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겐 미움이 생기는 것을요.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미움인가요. 그렇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지 않기 위해선 베풀어선 안 되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말고 베풂에만 오롯할 수 있을까요.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겼다.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맨날 점심 공양 후 설거지를 도와드린다면 앞으로도 당연히 내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잘 먹었습니다 하고 쌩 가버리는 건 마음에 걸리는데.

 나는 숨을 한번 푹 내쉬고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 그냥 점심 먹고 난 설거지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자. 맛있는 밥 차려주시는 데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지.

그렇게 긴 생각이 갈무리가 될 때쯤, 일체 무뚝뚝하고 딱딱한 말투였던 보살님이 어깨너머로 한마디를 던지신다.


"도와줘서 고맙네."


그 한마디에 우습게도 물고 늘어지던 모든 생각이 쫑, 사라진다.  




  

  




사찰에서는 정숙해야 한다지만, 제 직장 생활은 우당탕탕 인걸요. _ 계속

생생한 우당탕탕의 근무일지가 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 @woodangtangtang_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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