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말까지 근무했던 부서에서 선배와 큰 불화가 있었다. 나에 대한 뒷담은 도를 넘었고, 비협조는 업무 방해까지 이어졌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를 청할까 했던 생각은 사라지고, 괴롭힘을 방관하는 조직에 대한 분노도 참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지난 2년에 대한 인사고과와 승진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부서 이동을 신청했다. 22년 초에 만난 새 부서 사람들은 친절하고 성실했다. 하지만 리모델링에 대한 허가 문제로 5개 기관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었다. 리모델링을 하려는 기관과 현상유지를 하려는 기관, 실제 공사를 해야 하는 시공사, 입주를 기다리는 기관, 시설 관리자인 우리 부서 사이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졌다. 나는 어떻게든 합의점을 이끌어보려고 전화로 이메일로 씨름을 하는데, 그게 필요 이상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처럼 오해를 사, 사무실 한복판에서 선배에게 크게 혼이 났다. 결국 나는 참았던 눈물을 아이처럼 펑펑 쏟아냈다. 내 감정과 마음은 이미 고장난지 오래였다. 더 이상은 억지로 웃을 수가 없었다. 친절과 감사는 이미 오래전에 동이 났다. 모든 걸 멈추고 싶었다.
[ “조울증으로 휴직을 신청합니다.” ]
업무 강도가 큰 부서도 아니었고 사람들도 좋았는데, 출근하는 게 고역이 됐다. 사람을 대하거나 전화를 받는 게 두려웠고, 매일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그저 버티고 버텼지만 출구가 없는 동굴에 갇힌 것 같았다. 마음이 지옥이니 쥐어짜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백기를 들고 도망치기로 했다. 남들이 핑계라고 회피라고 비웃을지라도, 나는 응급 처치가 필요했다. “팀장님, 조울증이 재발하여 휴직을 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아닌, 질병에 의한 휴직. 그것도 승진이 다소 늦어진 건축 7급 직원이, 얼마나 많이 아프길래. 애초에 나는 빨리 높이 올라가는 게 목표가 아니었기에, 그런 시선은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어떤 동료들은 약간 슬퍼하는 눈치다. “1년이나 쉬니까, 조금 부러운데요?” 농담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주는 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은 조심스러워했다. ‘양극성 정동 장애’라는 병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또는 내가 불편해할까 봐 언급을 일부러 피했다. 젊은 사람이 꾀병을 부린다고 오해도 했지만, 나와 조울증에 대해 무지한 극소수의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 “그 병은 밖에 알리지는 말고” ]
회사 선배가 나를 살짝 밖으로 불러 위로와 조언을 해주셨는데, 그중 한마디가 콱 박혀 며칠 내내 혼란스러웠다. “아, 그 병은 밖에 알리지는 말고…” 선배는 괜한 소문이 퍼질 것을 미리 걱정한 것이다.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 약하다는 것, 불이익을 받기 쉽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 한마디에 내 안에 있던 수많은 감정들이 이상할 정도로 요동쳤다. 사실은 나도 처음에는 ‘조울증을 앓는 자신’이 너무 싫었고, 들키기 싫은 약점 같아 늘 숨겨왔다. 조울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의 일부로 사랑하기까지는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겨우 사랑하기 시작한 나의 정체성인데... 나 조차도 나를 부끄러워하고 숨기면, 누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해 주지? 나는 이상한 오기가 생겨 인스타그램에 글을 남겼다. “그간 심해진 동료와의 갈등, 감정 기복, 쇼핑 중독 등의 증상으로 볼 때, 조울증이 재발했음을 인정합니다. 친절과 감사가 바닥나 좋은 사람들과 멋진 회사를 미워하기 전에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나의 휴직에 거짓 핑계를 달고 엉뚱한 소문이 무성해지길 원치 않습니다.잘이겨낸 시련이자 감수성이자 용기였던 조울증을 숨김없이 사랑합니다.”는 내용의 공개적인 게시물이었다. 그 글을 보고도 나를 미워할 사람은 미워할 것이고, 이해할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숨긴다고 나아질 건 없음으로, 나는 그저 후련했다.
[ “내 주변에도 우울증 환자가 많더라.” ]
착한 고모였지만 가끔 순수하고 꾸밈없는 말투로 내 속을 긁었다. “우리 계에 우울증 환자들이 복직하더니, 업무량을 줄여 달라고 하더라. 너랑은 다른가? 그거 치료가 오래 걸리나?” 아마 정신 질환이 요새는 흔한 병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콤플렉스 때문인지, 어쩌면 내 자신이 가진 조울증에 대한 관념 때문인지. 나는 다 괜찮다며 이해한다는 식의 쉽게 하는 말들이 거슬렸다. “꾀병인지 죽을 정도로 힘든지, 개인차가 클 텐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요점은 낫게 해 달라는 게 아니라, 일을 줄여 달라는 거 같아.” 하지만 고모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치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일반화하는 것 같았고, 일반인과 다르게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조울증이라는 단어를 금기시하는 건 싫었는데, 막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얘기를 꺼내니 그것 또한 몹시 불쾌했다. 내 병을 모른 척해주길 바랬나, 그렇게 큰 소리로 공론화할 건 또 뭐 있나. 조울증 환자를 대할 때, 어떤 태도가 좋은지 나 조차도 잘 모르겠다. 아직은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우리 사회도 적응하는 중인 것 같다. 다만 내 마음에 걸릴 게 없다면, 그렇게까지 부자연스럽진 않았을 텐데, 아직은 내가 놓지 못한 마음이 있는 것 같다.
[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저평가 ]
인수인계 때문에 휴직 중에 예전 부서를 다시 찾았다가, 팀장님과 카페에서 따로 면담을 했다. 동기 중에 승진 서열이 꼴찌인 내가 휴직까지 하니, 신경이 쓰이신 모양이다. 나는 원래도 인사평정 결과를 확인하지 않는 편이지만, 연차가 겹친 바람에 마지막 등수 발표일에는 아예 열람을 못했다. 휴직을 앞둔 조울증 환자가 열심히 만근 중인 직원들보다 점수를 잘 받았을 리는 없다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학생 때는 어디를 가나 1등이었지만, 회사는 학교와 달랐고 혼자 잘난 직원을 좋게 평가해 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부조리합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와 같은 직설적인 소신 발언으로 사람들과 마찰이 많았다. 좋게 말하면 강직한,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 없는 내 이미지는, 선배들과의 불화와 엉키면서 눈덩이 같은 소문까지 만들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져주라는 사람들의 부탁과 달리, 나는 열심히 일할수록 고가는 떨어지는 상황에 쳐해 있었다. 항상 친절한 일보다는 옳은 일을 쫓았다. 업무 결과가 잘못되면 옳지도 친절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빠른 출세를 위해 도리를 다한 게 아니란 거다. “팀장님, 1등은 학생 때 지겹게 많이 해봤어요. 저는 회사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그냥 저다운 게 좋아요. 그리고 마음에 안정을 찾으면 사람들과 더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 내가 먼저 돕는 게 손해일까 ]
‘옳은 일을 하는데, 친절까지 해야 해?’라는 나의 오만한 태도는 4년 반 동안 많은 적을 만들었다. 다수의 선배들이 소문만 듣고 나를 어려워하거나 싫어했다. 하지만 휴직 전에 친절과 감사에 대해 크게 깨닫는 일이 있었다. 공사 예산이 부족해 직접 수리할 곳이 많은 부서에서 처음에는 또래 직원들과 어색했고, 도와달라 얘기를 꺼내는 게 어려웠다. 한 날은 개인 업무도 안 풀리고, 일손도 부족하고 예산도 없다며 징징거리다 답답한 마음에 유튜브 타로로 운세를 봤는데 “먼저 도와주세요.”라는 해설이 나왔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다음 날부터 동료들의 일을 나서서 돕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답답하다며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꽃을 심고 물을 주고, 공연 준비를 하고, 마이크 선을 정리하고, 엘리베이터를 걸레로 닦고, 대관 물품을 갖다 주고, 민원인에게 커피를 내주고, CCTV를 모니터링하고, 간식거리를 세팅했다. 가리지 않고 전부 내 일인 것처럼 친절과 감사를 속으로 되내면서, 전혀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속는 셈 치고 타로의 조언대로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은 눈에 띄게 화기애애해졌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해졌다. 내가 조금이라도 곤경에 쳐하면 사람들이 먼저 도와주러 다가왔다. 먼저 내밀었던 도움의 손길이 단단한 신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내 편이 있다는 게, 함께 힘을 합친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논리’와 비교할 수 없는 ‘태도’의 힘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 친절한 마음과 친절한 척하는 마음 ]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하라.
- 마태복음 6장 3절 -
어릴 때 우리 세 자매가 서로 원하는 인형을 갖겠다고 자주 싸웠다. 서로 할아버지 택시 조수석에 타겠다고 다투기도 했다. 고기반찬을 서로 먹겠다고 빨리 먹던 습관이 아직도 있다. 그리 풍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집안이었지만, 언제나 경쟁은 있었다. 어렸지만 나는 묘수를 생각했다. "양보하는 착한 어린이가 돼보자." 아마 유치원에서 배운 미덕일지 모르지만, 나는 결심이 선 이후로는 많은 걸 양보했다. 어른들이 "착하다." 칭찬을 해주니 신이 났지만, 딱히 언니와 동생을 위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인형은 다음에 갖고 놀면 됐고, 택시는 뒷자리도 충분히 편했고, 고기반찬은 맛만 봐도 됐다. 그때 나는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날은 의문이 들었다. "나 지금 착한 척하는 건가?" 그리고 그 의문은 32살까지 종종 들었다. 친절과 감사를 외치는 긍정 확언을 자주 하지만, 인생의밑바닥에서 그런 것들은 다 연기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인정한 것이 '먼저 내가 살고 보자'였다. 내가 살만해야 다른 사람을 보는 여유가생겼다.마음이 뒤엉켜 넘치는 날에는 차라리 타인보다 나를 먼저 챙겼다. 당장 내가 죽겠는데 주변을 돕고 잘보이는 게 무슨 소용인가. 구지 그런 위선으로 인정 욕구를 채울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음이 정리되고 비워지자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기꺼이 양손에 짐이 많은 아주머니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고, 길을 잃은 할머니를 정류장까지 데려다 드리고, 서류 업무가 밀린 동료의 잡일을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엉뚱한 마음을 버리고 나니, 바닥에 깔려있던 이타심이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그리고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돕는 마음'의 즐거움을 조금씩 알게 됐다.
[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이분법 ]
어디를 가나 최선을 다해 도리를 지켰던 나는, 차라리 피해자가 되는 편을 선호했다. 과제를 할 때는 자료 준비부터 발표까지 도맡았고, 회사에서도 사무분장이 애매한 일은 그냥 내게 달라고 했다. 과로로 쓰러지면 쓰러졌지, 피해를 줬다며 욕을 먹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잣대는 서서히 타인에게로 번져갔다.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가해자라며, 지나치게 비난하고 혐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오만하고 무결점 했던 나의 칼 같은 논리는 슬럼프에 빠진 나를 찌른다는 것이다. 번아웃이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있던 날, 사람이 무서워서 전화를 피하는 날도 생겼다. 나는 더 이상 피해자 집단에 들어갈 수 없었고, 가해자 집단에 들어갈 위기에 놓였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역전의 순간, 내가 손가락질했던 사람들이 배로 늘어나 나를 손가락질하는 망상. 그런데 사실 피해자, 가해자라는 분류도 내 머릿속에서 나온 기준인데 말이다. 손가락질을 하지 않고 화살을 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는 내 비난의 손가락과 독이 스민 화살을 전부 부러뜨려야,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그런데애초에 내가 가진 손가락과 화살은 어디서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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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살, 명절, 변명 ]
분노하는 어린 친구에게
"어, 원래 세상은 불공평해."
담담하게 말하는 어른이 됐다.
늙었다는 기분이 든다.
사실 나도 그랬었는데.
나는 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못지않게 부글부글 했던 내가
분노와 치기가 사그라들어
숨쉬기 편해진 것도 사실이다.
나도 일정 부분 세상에 가담했고
지분도 있어할 말이 없다는 것은
이 나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다시 무한한 힘을 상상해 본다.
나를 위해 쓰지는 말아야지.
큰 세상 속 작은 일을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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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조울증 선고를 받았던 날 ]
영화 속 흑백 화면이나 슬로 모션 같은 장면이 내 기억에도 있다. 자욱한 안개가 낀 것 같은, 누가 손톱으로 막 긁어놓은 것 같은. “공격적인 말에 싸움이 잦아지고, 화려한 옷을 좋아하고 쇼핑 중독으로 인한 카드 빚이 심각하고, 허황된 사업 계획을 세우고,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며 두뇌회전이 빨라지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잠이 없어졌네요. 길었던 울증이 끝나고 조증이 시작됐습니다. 다시 말해 조울증, 양극성 정동 장애입니다.” 의사의 진단에 삼일 정도는 트루먼쇼 같은 상황을 부정했다. 나는 억울하게 부조리로 퇴사를 당한 피해자일 뿐인데. 강제로 입원한 것도, 사람들이 나를 환자 취급하는 것도, 모든 게 엉망이 된 것도, 계속 약을 먹이는 것도, 이상할 뿐이었다. 그러나 잠시 자존심을 내려두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의지로, 의료진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게 치료의 시작이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 생각과 세계에 갇혀 살지 않나. 그저 진실을 직면하기로 결심했고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부정기를 끝내 의사들을 놀라게 했다.
[ 부산에서의 약물, 상담 치료 ]
입원 치료 중에 약 부작용으로 체중이 57kg에서 67kg까지 증가하고, 손이 떨리고, 무기력하고, 변비 증세가 생겼다. 하지만 퇴원 후 부산에 내려와서도 3주마다 약을 타서 재발을 예방했다. 큰 정신과는 예약을 해도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고 아침, 저녁 나눠서 약을 줬기에 약 기운에 하루 종일 몽롱해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 작은 정신과로 옮겼는데, 다행히 웨이팅은 줄고 상담시간이 조금 생겼다. 약은 취침 전에 한 번만 복용하게 바꿔 규칙적인 숙면도 할 수 있게 됐다. 몇 년간 지독하게 시달린 불면증을 약의 힘으로 벗어난 건 신의 선물이었다. 또 약은 기분이 너무 우울해지거나 너무 들뜨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고마운 안전장치였다. 비공식적이지만 짬짬이 받는 주치의 선생님과의 상담도 많은 도움이 됐다. 보통 상담은 1시간에 15만 원부터 수십만 원까지 하는데, 선생님은 비용 없이 내 고민을 경청해주시고 공감해주시고 조언해주셨다. 도합 20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전화도 오고 다른 환자에게도 들렀다 오기도 하셨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절대 이해 못 할 깊은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단비 같았다.
[ 조울증 환자의 공기업 입사 준비 ]
조울증 입원 치료로 가족들에게 금전적인 정신적인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에 시달렸다. 빨리 노력해서 경제적인 능력도 갖추고 감정 기복도 줄이고 싶었다. 그래서 간절히 원하게 된 게 공기업 건축직이었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을 친 상태에서, 기약 없는 취업 준비가 시작됐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친구들을 마주칠까 두려워 지하철도 버스를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탔다. 기상 시간을 강제로 앞당기기 위해 아침 취업 스터디에 가입해 열심히 다녔다. 그러나 병 때문인지 약 때문인지 두뇌회전이 예전보다 현저히 둔해졌고 2년 가까이 필기시험을 낙방했다. 나는 스터디 사람들보다 문제 푸는 속도가 절반 정도로 느렸고, 그들이 순서대로 공기업에 합격하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내가 불쌍했는지, 한 날은 동생이 이제 그만하고 작은 회사에 들어가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가족들이 더 이상 나의 취업 준비를 돕기 어렵다는 말에 나는 오열했다. 이걸로 내 건축 커리어는 끝인가, 하는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한 달 뒤 나는 운 좋게 부산의 공기업에 추가 합격을 했다.
[ 이야기가 사라진 적막한 세상 ]
그렇게 눈물겨운 2년의 노력으로 겨우 들어온 행운 같은 회사였는데. 감사를 잊는 순간 슬럼프는 찾아온다더니, 휴직 직전에 내가 딱 그랬다. 내 자신에 대한 실망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 조직에 대한 원망이 복잡하게 얽혀 속이 타들어갔다. 나는 숨을 쉬기 위해 휴직을 했고, 그럼 마냥 편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집에서 혼자 쉬니 머리가 뜨겁고 욱신거렸다. 마치 내가 멸망한 지구를 떠나 화성에서 혼자 호화로운 파티를 벌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꿈꿔 왔던 집에서 하루 종일 자유롭게 놀고먹는데, 왠지 쓸쓸하고 불안한 기분이 든다. 왜냐고, 뭘 원하냐고,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나의 욕구와 결핍은 단지 배부르고 등이 따뜻한 것 이상으로 복잡한 걸 원하고 있었다. 적막감, 당시의 나에게는 사람과 이야기가 없었다. 가끔 오는 걱정 가득한 엄마의 전화, 유튜브로 시청하는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였다. 사무실에서 나누던 형식적인 일상 대화조차 없어진 적막한 세상. 나는 스스로를 침묵이라는 감옥에 가둔 것일까. 그렇게 도망쳤던 사람과 이야기가 다시 그리워졌다.
[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 ]
돌이켜보면 나는 조울증을 앓으면서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말투가 직설적여지고, 허황된 공상을 많이 하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그게 참 좋기도 하면서 참 싫었다, 마치 모두가 자신을 애증 하듯이. 특이한 내 성격에 질려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는 날에는, 비참한 기분으로 인과 관계를 따져봤다. 나는 어쩌다 이 모양이 됐을까, 마음이 고장 난 사람처럼. 우주의 기운? 전생의 업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세포? 어머니의 태교? 유아기의 애착 관계? 부모님의 불화? 친구 관계의 트라우마? 짐작은 해보지만 그저 심증일 뿐이다. 어쨌든 마음을 뒤적뒤적 뒤지다 보면 항상 제일 크게 걸리는 것은 아버지였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출근을 하지 않던,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고 어머니의 비난을 받아왔던 아버지.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고생했다는 생각이 쉽게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불화가 너무 싫었지만,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나 회사에서 성실하게 도리를 지켰지만, 도리를 다하지 않는 누군가를 보면 질타하는 모진 성격이 됐다. 꼭 누군가를 원망하고 몰아세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아버지가 림프암 3기 판정을 받고 나서야, 내 미움이 과했으며 그 콤플렉스가 나를 망쳐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마음을 버리겠다는 결심 ]
자기 세상에 푹 빠져 왜곡된 마음에 휘둘리다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나는 25년을 마음이 만든 착각 속에 살았다. 아버지가 나를 괴롭힌 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내 마음이 나를 괴롭혀 온것이다. '이해해야지, 용서해야지, 사랑해야지, 근데 왜 이렇게 분할까, 그 일만 아니었어도, 그 말만 아니었어도.' 마음은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언제부터는 모든 게 아버지 때문이라는 논리에 푹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만약 오늘 기억 상실증에 걸려, 내일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어떤 고통도 없이 아버지와 놀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누구도, 아무것도 괴롭지 않을 것이다.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내 안에서 가장 오래 곪은 거대한뿌리 같았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아버지는 나쁜 사람,그런 이분법이 마음 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상과 관계와 마음은 그렇게 칼로 가를 수 없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낱장으로 펼쳐놓고 보니, 사랑과 연민과 감사가 있었고, 내가 당연시 받아온 희생과 친절도 보였다. 억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이해해야지' 하는 것도 마음이니까. 언젠가는 이 마음을 다 버리고 아버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진짜로 마음이 옅어질 때쯤에,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된 날이 왔다.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할 수 있다는 것. 피해자, 가해자구도에서 벗어나 있는 그 자체의 아버지를 마주 하는 것. 먼 길 돌아온 나는 자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약, 그거 이제 끊을 때도 안됐니.” ]
직장 일에도, 가사 노동에도 늘 성실했던 어머니는 무뚝뚝하지만, 항상 마음으로 나를 아끼시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끔은 못 견디게 나를 찌르는 말투가 있었다. 엄마는 기본적으로 칭찬이나 애정 표현보다는 잔소리나 조언, 걱정이 먼저다. 한 번은 “조울증 약, 슬슬 끊는 게 어때?”라고 물어보신다. 질문 자체가 이상했다. 약의 용량이나 성분은 내 조증과 울증의 상태를 전문의가 분석하여 처방해 주는 것이지, 내가 원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약을 마음대로 먹거나 끊으면 조증이나 울증이 재발하여,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강제 입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아마 엄마는 내가 보통의 또래 아가씨들처럼 약 없이도 생활하고, 결혼해서 아기도 낳길 바래서 그런 말을 했을 거다. 하지만 조울증은 유전 질환으로, ‘완치’보다는 ‘관리’ 개념에 가깝다. 결국 나는 “엄마가 어떻게 조울증에 이렇게 무지할 수 있냐.”며 크게 화를 내버렸다. 그건 사실 나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였다. 조울증을 앓아, 다 크고 나서도 엄마를 이렇게나 걱정시키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니까! 그냥 이게 나라니까!”라고 소리를 지르자 엄마는 살짝 눈물까지 보였다.
[ “예민하게 살지마, 마음을 내려놓아.” ]
우리 집안에 말투가 고운 사람이 별로 없는 와중에, 나는 톡 쏘는 엄마를 닮은 것 같다. 나이 든 엄마를 상대로 다 큰 딸이 언성을 높이는 게 부끄럽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휴직 중에 가장 자주 만나고 밥을 사준 사람은 어머니였는데도, 하루 한 번 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게 조금은 부담이었다. 둘 다 무뚝뚝한 터라 할 말이 별로 없었고, 젊은 내가 하는 일도 없이 돈을 벌지 않고 쉬고 있는 게 면목이 없어서다. 공장에서 본드 칠로 체를 수리하는 고생을 하셔서인지, 어머니는 손이 다 트고 귀가 자주 시리고 허리도 아프시다. 전화로 엄마가, 올해까지 일하고 퇴직금을 받으니 내게 천만 원을 주신단다. 엄마는 계약직으로 좀 더 근무하고 싶었지만 내년에는 젊은 남직원을 뽑게 된 것 같다. “아니야, 돈 엄마 써. 그리고 좀 쉬어, 너무 바쁘게 살았으니까. 나는 7월에 복직할게.”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래, 예민하게 생각해서 다투지 말고, 마음을 내려놓아.” 엄마가 나의 콤플렉스를 순간 건드렸다. “엄마, 나는 사람들이랑 관계 맺는 게 어려워. 내 병 알잖아, 왜 그런 말을 쉽게 자주 해. 내가 누구를 보고 상냥한 걸 배워?” 빠르게 비수를 꽂는 것도 조울증의 증상 중 하나다. 그런 말을 듣고도, 엄마가 멋쩍게 웃는다. 죄책감에 눈물이 펑펑 솟는다. 엄마 말이 다 맞기 때문이다. 예민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그게 내 소원이었다.
[ 마음을 담은 레시피와 동영상 ]
사랑하지만 나와 너무 다른 엄마와 다투고 나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엄마가 먼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기에는, 미안한 마음을 전해야 해야겠다는 생각이 급했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말을 꺼내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조심스럽고 민망하여, 그때마다 엄마에게 카톡으로 엉뚱한 레시피와 음식 사진을 보냈다. 즉석 떡볶이가 끓는 영상, 김치찌개를 포함한 한식 상차림, 자주 먹는 제철 과일, 엄마가 준 멸치 육수로 끓은 찌개, 방금 완성한 오므라이스. 기름을 잔뜩 두르고 센 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파전, 그 위에 금방 터뜨린 계란을 찍은 짧은 동영상. 화제를 전환하기 위한 레시피도 써내려 간다. “엄마가 준 잔파, 양파에 부침가루, 물, 소금 섞어서 구웠어. 뒤집고 계란을 터뜨렸어.” 그러면 엄마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와, 근사한 한상차림이네.” 하고 받아준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서로를 아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그 어떤 갈등도 승패도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화가 사라졌던 모녀의 카톡방에는 언제부턴가 요리 이야기가 꽃 피고 있었다. 엄마와 다시 웃으며 얘기할 수 있다면 그거면 됐다.
[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다. 고작 12,500원을 내고 3주 치 조울증 약을 타 오는데, 담당의 선생님께서 틈틈이 상담을 해주시니까. 물론 한두 시간 씩 하는 정식 상담이 아니라서, 중간중간 전화도 오고 다른 환자를 보러 가시기도 하지만, 도합 20분 정도 되는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 소중했다. 선생님은 어릴 때 출가를 꿈꿨을 정도로 진리 자체를 탐구하는데 열의가 있으셨고, 한 때는 문학인을 꿈꿀 정도로 감수성도 풍부하시며, 정신건강과 관련한 각종 공부를 아직 치열하게 하고 계신, 삶에 대한 성찰이 깊으신 분이시다. 그냥 남들처럼 돈 많이 벌어서 배부르게 사는 걸로는 충족되지 않는 복잡한 결핍과 욕구에 대해, 얘기를 하면 크게 공감을 해주셨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내가 조울증 때문에 과민해진 건지, 상대방이 내게 무례한 건지 구별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저는 조울증이라는 색깔과 경험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고, 언젠가는 누군가는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어쩌면 이 글이 위로와 공감, 영감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이게 제가 조울증을 저의 일부로 사랑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에요.” 그러자 선생님은 진심으로 응원해주셨다.
[ 작은 이야기를 심는 세상 ]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두현은 말이 너무 많은 아내 정인이 극도로 부담스러워, 카사노바 성기에게 유혹해 줄 것을 의뢰하지만, 성기가 정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자, 정인은 다시 소녀처럼 사랑스러워진다. 오늘날 대화가 끊긴 집에서도, 방마다 각자의 폰으로 유튜브는 재생되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서핑하며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이야기를 탐색해 본다. 누군가는 개인주의가 도래하면서 소통이 사라졌다지만, 나는 왠지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 든다.
[ 분권과 선택의 시대 ]
큰 방송국에서 톱스타가 주연하는 대하드라마를 전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몰두하던 수동적인 시대는 끝이 났다. 대형 조직, 권력이나 자본이 국민 다수에게 노골적인 메시지를 심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심하여 콘텐츠를 소비한다. 취향은 나노 단위로 나뉘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렇게 인류가 본능적으로 찾아온 '이야기'는 '콘텐츠'와 '저작권'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알지만 모르는 사이, 얕으면서 깊은 유대가 많아졌다. 틈나는 대로 통신망에 접속해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찾아내고, 더 많이 더 먼저 듣기 위해 지갑을 열기도 한다. 더 이상은 주어진 환경과 인간관계에 목매지 않게 된 것이다. 관계와 소통은 갑자기 사라진 게 아니라 서서히 옮겨간 것이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구분이 어려운 가짜 세계가 아니라, 일상의 민낯을 줌인해 펼쳐 놓은 간편하고 느슨한 연대 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