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보면 그 사람의 정신 상태가 보인다고 한다. 몸도 마음도 처절하게 망가진 휴직 직후의 나, 그리고 우리 집은 누가 봐도 엉망이었다. 연초에 공들였던 인테리어가 안 보일 정도로 집은 너저분했다. 7월까지만 해도 뚜비가 자기 방에 배변 실수를 해 지린내가 온 집안에 났다. 곳곳에 이빨로 갉아먹는 방은 보수조차 포기한 방관 상태였다. 요리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기 싫어서, 식기세척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설거지에 날파리가 꼬였다. 어떤 일에 대한 과몰입이 끝날 때마다 찾아오는 번아웃 증후군. 최선을 다했지만 잘못 살았다는 실패감. 옳지도 친절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 일과 사람이 끊긴 고립 상태에서 오는 외로움. 시간이 남아돌다 못해 멈춘 것 같은 지루함. 인생의 나락에서 매일 맛보는 하찮은 인간의 무기력함. 연체된 카드빚과 독촉 전화에 대한 걱정. 정적인 가운데 격렬하게 파도치는 잡념과 감정 기복. 바닥을 친 자존감과 함께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무의식. 사람과 전화에 대한 공포. 마음을 맴도는 도를 넘는 살해 협박 ‘죽어, 실패한 인간아.’
[ 집에 있는 시간이 싫어졌다 ]
물건이 많을수록, 정리정돈이 안될수록 집에 많은 감정이 묻어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집을 치울 의지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의지는 더욱 없었다. 치열하게 살아온 만큼 슬럼프 시기의 패배감 역시 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ENTP에 워크홀릭, 완벽주의인 내 성격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냥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면 되는데, 나는 늘 과하게 일하고 과하게 슬럼프가 온다. 그럴 때면 유튜버 이연 님이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영상을 찾아보고 힌트를 얻고는 하는데. ‘기초 체력이 약해서 아무것도 경우가 많다.’는 얘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그래서 하루에 2시간 이상 산책을 하기로 했다. 뛰는 건 힘들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서, 그저 바람을 느끼며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씩 산책 시간을 늘리고 속도를 내고 체력을 되찾았다.
[ 중독된 걸까? 필요한 걸까? ]
도저히 청소할 의지가 생기지 않자 동기 부여를 위해, 넷플릭스에서 ‘미니멀리즘, 오늘도 비우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를 봤다. 광고에 길들여져서 물건을 계속 사고 신용카드에 의지하고 집은 어지러워져도, 더 많이 돈을 벌고 더 넓은 집을 사려는 현대인의 물질 중독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머니의 자질구레한 유품을 정리하면서 화자는 ‘물건의 굴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욕구와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들 중에 정말로 쓰는 것은 몇 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 년에 고작 몇 번 쓰는 물건,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산 물건,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 여러 개 있는 물건, 유행이 지난 물건,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을 버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기존의 1/10밖에 안 되는 물건으로도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오히려 집은 깨끗하고 넓어졌다. 성공했다는 기분을 누리려 허영에 돈을 쓰지 않으니 더 적게 일해도 되고 시간적 자유가 생겼다. 그러자 정신 건강이나 삶의 여유, 진정한 행복, 마음의 힐링, 꿈의 실현, 가족 사랑과 같은 발전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다큐는 필요 없는 것을 하루에 3개씩 버려보자는 챌린지를 권유하며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30개, 300개라도 버리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거리고, 뭐라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 더는 쓰레기처럼 나뒹굴 수 없어 ]
‘행복한 일이 생겨야 웃지.’라고 생각했던 나는, 언제나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입꼬리가 쳐져 있었다. ‘웃어야 행복한 일이 생기지.’란 건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인생이 밑바닥을 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크게 없었고,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태도, 생각, 마음이었다. 휴직 전에는 밤마다 ‘나는 할 수 있다. 세상은 친절하다.’라는 긍정 확언을 들으며 울면서 잠을 청했다. 죽고 싶을 때마다 오히려 미친 척하고 친절과 감사를 쥐어짰다. 그러자 세상이 정말 조금씩, 정말 천천히 내게 화답했다. 싸늘하고 공격적인 내 아우라가 소탈하고 평범한 아우라로 바뀐 것일까. 사람들이 내게 작은 도움을 청하거나 주기도 하고,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은영 선생님이 아이의 태도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듯이, 강형욱 훈련사가 개의 태도가 바뀔 때까지 기다려주듯, 신이 매사에 부정적이던 나를 기다려주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도움이란 건 이렇게 받는 거구나, 그동안 내가 너무 정색을 하고 말이 없어서 사람들이 나한테 못 다가왔구나. 내가 칼 같고 경직된 이미지였구나.’ 그리고 휴직 한 달 차, 나는 다시 한번 밑바닥을 딛고 올라가 보기로 했다. 심해저는 충분히 질릴 만큼 구경했다.
[ 비움의 미학, 매일의 습관 ]
빨리 ‘비움’을 실천하고 싶은 생각에 열정적으로 당근 마켓 활동을 했다. 애매한 물건들은 무료 나눔을 하니, 한 시간 내로 가져갔다. 안 쓰는 가전은 반값에 올리니 며칠 내로 연락이 왔다. 제값에 사서 반값에 파는 게 속이 쓰렸지만, 그렇게 만든 비상금이 채무 상환에 요긴하게 쓰였다. 그리고 밀린 빨래, 설거지, 청소를 했다. 가사노동은 미룰수록 양이 많아져 끝도 없이 미룬다는 것을, 쓰레기장 같은 집을 보며 뼈저리게 느껴서 앞으로는 설거지는 그날에, 빨래는 그 주에, 청소는 그 달에 끝내기로 맹세했다. 방치한 인테리어 하자도, 조금씩 재료를 사서 직접 보수를 했다. 아침마다 환기도 매일 했다. 그 쯤부터 뚜비의 배변 실수가 줄어, 배변판에 100% 가리게 됐고, 배변판을 하루에 두 번 이상 청결하게 세척하니 지린내는 사라졌다. 오다가다 물건을 걸쳐놔서 어지럽던 거실의 8인 테이블도,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습관을 굳히면서 결국은 청결해졌다. 그렇게 조금씩 집에 대한 애착을 되찾았다.
거실의 유리칠판, 일정 관리가 건강한 백수 생활을 만들었다.
[ 루틴이 습관으로 자리잡기까지 ]
뚜비가 배관을 물어뜯어 에어컨이 고장 났던 무더운 여름, 휴직 초반에는 오후 3시까지 퍼질러 자다 일어나면 하루가 이미 절반 이상 지나간 기분에, 잠을 너무 많이 잔 까닭에 개운하지가 못했다. 새벽에 불규칙적으로 먹는 야식은 위장을 배려 며칠 설사로 고생을 했다. 정신과 주치의도 다른 건 몰라도 11시~8시 수면은 심신의 건강을 위해 꼭 지켜야 한단다. 새벽에 감성이 돋아 쓴 글들도 많았는데,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느끼하고 부담스럽다. 나의 무신경한 새벽 발소리에 아랫집 아저씨가 조용히 해달라고 또 올라오실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모두가 잠든 사이에 깨어 있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은 역으로 나를 시간에 인색해지게 만든다. 즐거워야 할 뚜비와의 산책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게 엉망이 된 루틴. 나는 건강한 루틴이 필요했다.
[ 은근 바쁜 백수, 루틴의 중요성 ]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갈 곳 없이, 만나는 사람 없이, 지루한 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취업 준비를 처음 시작할 때도 그랬기에, 나는 어떻게든 그 패턴에서 벗어나고자 머리를 썼다. 첫째는 최소한의 일과를 곳곳에 배치해 규칙적인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돈도 친구도 없던 나는 그저 9시에 눈을 뜨면 덕천의 영화관으로 걸어갔다. 왕복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걸으며, 조금씩 길을 바꿔 매일 다른 골목길과 알록달록한 집을 구경했다. 저 삐뚤빼뚤한 지붕은 누가 만들었을까, 저 추워 보이는 집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에 가고 싶을까, 누가 이렇게 노랗게 페인트를 칠할 생각을 했을까, 저 낡은 간판을 왜 안 고칠까,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상상과 이야기를 덧붙이며, 할머니와 손자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영화관 로비에 1,500원하는 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가서 앉았다. 사람 구경을 하고,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유튜브 영상을 봤다. 그게 당시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는 근처 중고서점을 한 바퀴 쓱 둘러보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온다. 1시까지 집에 돌아와 다소 간단하게 요리를 해 먹는다. 식사하면서 TV로 유 퀴즈나 스트리트맨 파이터를 집중해서 본다. 3시 전후로 기온을 봐서 뚜비 산책을 시킨다. 단두종, 단모종 불독을 나체로 산책시키려면 타이밍과 페이스 조절이 필수다. 5시쯤 원고를 퇴고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장미가 가득한 공원이나 식재료가 가득한 대형 마트를 혼자 가볍게 다녀온다. 7시쯤 집에 돌아와 식판 5칸이 찰 정도로 나름 정성스러운 요리를 한다. 8시쯤부터 가사노동을 하고 집을 정돈한다. 10시쯤에는 그날 입었던 옷의 코디를 사진으로 남겨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그날의 감성을 끄적여본다.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뒤적이다 12시 전에 잠이 든다.
[ 가끔은 돌발 비일상도 필요하다 ]
건강하게 자리 잡은 루틴 속에서도 갑자기 미친 듯이 지루한 날이 있다. 여행의 낭만이나 사치를 전혀 모르고 살았던 나였지만, 그냥 휙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드는 날. 365일만 쉬겠다고 낸 휴직인데, 365번 똑같은 하루를 살다가 복직하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똑같은 패턴이 주는 반복되는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컸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즉흥적인 당일치기 기차 여행이다. 멀리 가기엔 돈이 없었고 뚜비가 혼자라 오래 집을 비우긴 힘들었다.
2022. 11. 19. 월급날 간만의 보상 벼르다 방문한 케이크 가게
올해 들어 처음으로 통장 잔고가 찰랑이는 요며칠이다. 석달만 버티면 재정 상태가 마이너스를 벗어나고 신용카드를 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인다. 국가기관의 채무조정으로 고리 대출을 저리 대출로 전환하고 상환기한을 늘이는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다. 절약이든 국가 지원이든 용돈이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재정 상태를 정상 궤도로 돌이키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지만, 한 달에 한 번 있는 월급날에는 나를 위한 보상을 한다. "허리띠 졸라맨다고 그 동안 수고 많았어." 허용가능한 사치는 다시 삶을 일궈나갈 원동력을 준다.
[ 도움만 받다 온 청도 여행 ]
"혼자 떠난 여행이 처음부터 즐겁기는 어렵다."
- 김영하 [ 대화의 희열 ] 중에서 -
무궁화호 편도 티켓, 첫차로 새벽에 청도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고 카페를 찾아갔지만 당일은 휴무였고, 그 아래 가정집에서 커피 한잔을 얻어 먹었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와 수다를 떨었고, 아주머니가 추천해주신 근사한 용암 온천도 갔다. 목욕 후 와인 터널까지 소나기를 맞으며 또 한참을 걸어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차를 세워서 우산을 주신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아직 많다니 신기하다. 그런데 와인 터널은 생각보다 짧고 추웠고, 나가는 너무 차편이 뜸했다. 비에 젖은 몸으로 카페에 들어갔는데, 설상가상으로 폰이 방전됐다. 사장님께 부산으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쭤보니, 역까지 직접 태워주신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한번 들려 달라고 싱긋 웃으신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옆자리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눴는다. 장례식장에 다녀왔는데 그 집 딸이 우울증이라 걱정이란다. 나는 생각보다 우울증이 너무 흔하다고 그 분도 꼭 스스로 이겨낼 거라고, 나도 조울증을 관리하는 중인데 이렇게 여행도 다니며 잘살고 있다고 했다.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온 만큼, 비를 쫄딱 맞고 걷기만 했던 청도 여행은, 위기가 올 때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는 신기한 일의 연속이었다. 도움받는 걸 어색해하고 싫어했던 나였는데. 어쩌면 세상은 마음만 먹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도움을 청하는 연습에 대한 회상 ]
뭐든 혼자 해결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다가, 예능에서 장항준 감독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김은희 작가의 덕을 보면서도, 자격지심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모습이, 밉기는커녕 귀여운 것이다. 나는 도움을 줬으면 줬지, 받으려고 했던 기억조차 별로 없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심지어 정신적인 문제로 바닥을 길 때도 나는 비빌 언덕이 없었다. 전문가의 도움이라도 받아볼 생각을 좀 일찍했다면, 그렇게 병을 키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어느 날 나는, 퇴근 길에 온 시민의 도움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참기름이 종이가방을 적시더니 툭 찢어, 바닥으로 떨어져 ‘팡’ 깨진 것이다. 유리 파편과 꼬신내가 진동하는 참기름이 순식간에 지하도 바닥을 뒤덮었다. 밟으면 큰 사고가 날까봐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발만 동동 구르는데 지나가는 행인들이 신문지와 휴지를 주셨다. 그래도 미끌거림은 여전했고 나는 결국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주임님...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때마침 사무실에 있던 또래 직원들이 장비를 들고 우르르 내려왔다. 내 젖은 신발까지 닦아주는데 수치스러워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 모습에 직원들은 깔깔 웃었다. “아니, 이렇게 든든하고 고소할수가.” CCTV에 찍힌 그 날 내 엉거주춤한 모습은 이후로도 놀림거리가 됐고, 그 뒤로 직원들과는 더 친해져 서로 막역하게 돕는 사이가 됐다.
[ 불독을 실은 가방을 실은 기차 ]
덩치가 큰 강아지와 기차여행을 하는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여러모로 힘들어 보여서 자차가 없으면 강아지 동반 여행은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지하철 한정거장 거리의 동물병원을 뚜비와 왕복하는 것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중성화 수술을 받고 집으로 오던 날, 뚜비를 안았다가, 손수레에 넣었다가, 스스로 걷게 했다가, 엉거주춤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바퀴가 달린 강아지 이동장을 주문했는데, 캐리어 같은 그 가방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뚜비와 멀리까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었다. 내가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가는 날이면, 뚜비는 집에서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새벽에 사료를 여기저기 흩뿌려주고는 한참 지난 늦은 밤에 돌아오곤 했다. 한 번쯤은 뚜비와 특별한 1박 2일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 대전으로 가는 편도 기차표 ]
강아지가 기차에 타려면 몇 가지 에티켓과 요령이 필요하다. 반려동물 자리는 성인 1명으로 별도 예매를 해야 한다. 그리고 가방(이동장)에 넣은 채로 탑승해야 한다. 탑승할 때 기차 문이 넓지 않아, 크고 무거운 뚜비 이동장을 싣는데 애를 먹었다. 무궁화호 안에서는 각칸 첫째 열이 비교적 공간이 넓은 편이다. 뚜비는 잘 짖지 않아 다행이었는데, 초반에 답답하고 불안했는지 애초롭게 낑낑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료를 조금씩 가방 안에 넣어줬다. 강아지 전용 룸이 있는 모텔을 오만 원에 예약한 것 말고는 어떤 일정도 정해진 게 없었다. 아침 일찍 대전에 도착했지만, 반려동물이 든 이동장을 끌고 갈만한 데가 생각보다 마땅치 않았다. 자차로 왔다면 지도 검색을 해서 여러 애견 동반 시설을 다녔겠지만, 이동장을 끄는 나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와 식당, 편의점과 공원을 애타게 찾아다녔다. 그날 아마 뚜비랑 5시간은 넘게 걸은 것 같다. 뚜비가 호텔 화장실에서 묶인 채 곯아떨어졌는데, 코 고는 소리가 옆방에 들릴까 걱정될 정도로 크고 우렁찼다. ‘아, 이렇게 걷고 걷고 또 걸을 거면, 가까이 부산도 좋은 산책코스가 많은데.’하는 후회도 살짝 들었지만, 뚜비와 먼 곳까지 오래 나와 있었다는 성취감이 커서, 그 뒤로는 자신감 넘치게 부산의 곳곳을 뚜비와 다닐 수 있게 됐다.
[ 나도 조울증 완치를 꿈꿨다 ]
내 브런치 통계의 유입경로에서 ‘조울증 완치’라는 검색어를 봤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처음 우울증과 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 나 역시 서점과 인터넷을 뒤지며 ‘완치’ 사례를 찾아 헤맸다. 이대로 내 인생은 끝이라는 절망감을 씻어내기 힘들어, 일상에 집중하는 게 불가능했다. 오직 관심사는 ‘완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정상인과 비정상인,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장애인과 비장애인, 소수자와 일반인에 대한 나의 이분법적인 편견이 굉장히 확고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불리한 내 상황과 위치에 위기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이후로 '내면의 치유'를 위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름 노하우도 쌓았다. 명상, 기도, 글쓰기, 산책, 나와의 대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 종교 이론 공부, 여행, 상담 치료, 약물 치료, 친절과 감사 긍정 확언. 정신 건강을 위해서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웬만한 건 다 해본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내 세상은 무너져 내렸고 다시 새싹이 피며, 나는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실제로 이런 노력들이 취업이나 내 집 마련, 감정 기복 호전, 인간관계 회복과 같은 결과 값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졌나요 ]
이런 글들을 차곡차곡 써놓는 것도, 필요한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내 이야기가 전달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내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 내가 어렵게 취한 것을 남들은 조금이라도 쉽게 취했으면 하는, 내 나름의 자아실현이자 인류애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내게 “그래서 지금은 다 괜찮아졌나요? 그래서 노하우가 뭔가요?”라고 다급하게 묻는다면 확답은 어려울 것이다. 매일 브런치에서 이렇게 말을 다듬는데도 대답을 하자면 나는 다시 신중하게 된다. “명상을 통해 100% 완치했고, 지금은 어떤 일에도 울지 않습니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하면 참 좋으련만, 그보다는 “많이 호전됐고, 꾸준히 관리 중이며, 조금씩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방황하며, 매일 행복을 고민한다. 나를 다 알 것 같다가도 미칠 것 같은 감정 기복에 휩싸이고, 세상을 파악했다 자만할 때마다 충격적인 일도 겪는다. 하지만 확실한 건 실체가 보이지 않던 뒤엉킨 마음을 직면한 이후로, 세상과 나에 대해서 조금씩 깨달아 간다는 것이다. 내 세상은 조울증을 계기로 자주 무너지고, 다시 단단해지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내공을 쌓았다. 그러다보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