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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마음 Oct 29. 2022

22년 7월, 나도 내 조울증이 어색하다.

[ 정신과 입원 병동에서 나눈 대화 ]

"아가씨는 무슨 병이야?"

"조울증이요."

"뭐? 조루증?"

"아니, 조울증..."

"아, 기뻤다 슬펐다 하는거~ 그래도 우울증 보다 낫네."

"그...런가요."

"그래, 공황장애보다도 나아."

" 아, 그런가요."

해맑은 사람에게는 내 병에 대해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도 어색한 내 병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를 시키는 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병 이름을 알리는 것부터, 조울증과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쉬운 일은 없었고,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 소중한 사람들을 막대한 이유 ]

술에 취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다음 날이면 미안해하는 사람처럼, 조증 에피소드 상태의 나는 내가 아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거만하고 경솔하고 공격적이며, 나만 그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다가 조증이 가시면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를 한다. 최악인 것은 어떤 갈등 상황은 기억도 안난다는 것이다. 평소답지 않던 모습에 사람들은 오해와 실망을 하고 멀어지기도 했다. 조울증을 겪으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런 상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는 친구보다 가족이 남게 됐다. 어떤 못난 모습도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가족. 언제부턴가는 실수투성이인 나를 나도 믿지 못하게 됐고, 새로운 사람에 대한 시도가 줄었고,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게 됐다. 그렇지만 이불킥을 해가면서도 예전 친구들을 매일 추억한다. 그들을 함부로 대했던 기억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언젠가는 기회가 된다면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고 싶었다.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한 번은 만나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변명 거리는 ‘조울증’ 밖에 없다. 납득할만한 변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단어가 아니면 운을 떼기가 어려울 것 같다. “사실은 그 때 조울증을 겪고 있었어.” 라는 말로 솔직하게 치부를 드러내며 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 단어가 실마리이자 희망일지 모른다.


[ 첫걸음 _ ‘괜찮은 척’ 내려놓기 ]

격렬했던 나의 첫 조증 에피소드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사내 성추행 이후,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욕설을 했다. 히스테릭해진 나는 그 길로 회사를 그만뒀고 모든 대인관계가 끊겼다. 분노를 풀 방법은 쇼핑뿐이었고, 그때는 심각한 과소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별 것 아닌 상황에도 두려움에 나를 방어하기 위한 공격적인 언행을 했고, 주변인들과의 오해와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힘들다는 걸 인정하면 무너질 것 같아서 더 센 척했지만, 마음은 매일이 전쟁이었다. 정말 조그만 거절조차 핵폭탄처럼 충격적으로 느껴졌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랐다. 당당한 척했지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여서 정상적인 사고판단도 되지 않았다. 사실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였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고 도와달라고 했다면, 강제 입원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둘째 걸음 _ ‘자존심’ 내려놓기 ]

처음부터 주치의 선생님과의 신뢰가 깊었던 것도, 언제나 상담 치료가 즐거웠던 것도 아니다. 내가 미쳤는지를 냉정하게 판단받는 것은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다. 처음 조울증을 통보받았을 때도, 나는 3일 간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조작된 강제 입원을 신고하려는 시도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자존심은 문제를 더 악화시켰고, 퇴원은 점점 멀어져 갔다. 결국 ‘그래, 그렇다 치자. 너희가 무슨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 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다시 조증 에피소드의 구체적인 증상을 인지하고, 내 지난 모습과 비교해보니 거의 다 일치했다. 공격적인 언행, 화려한 옷차림, 무리한 사업 계획, 방방 뜨는 기분, 잠을 안자도 피곤하지 않는 기분, 쇼핑 중독. 몇 달간 세상이 내게 왜 그렇게 난폭하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내가 세상에 난폭하게 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존심을 내려놓자 조울증을 인정할 수 있었고, 치료가 시작됐고 동시에 깊은 우울도 시작됐다.


[ 셋째 걸음 _ ‘불신’ 내려놓기 ]

조울증 치료의 목표는 완치가 아니다. 극단적인 조증, 울증 상태를 예방하고 평균적인 감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감정이 널을 뛰어도 정작 스스로는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나를 안정되게 붙잡아줄 수 있는 병원과 의사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세 개 병원에서 여덟 명 정도의 의사에게 약물 또는 상담 치료를 받았는데, 모든 부분이 처음부터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어떤 의사는 말투가 엄격하게 느껴졌고, 어떤 의사는 연차가 짧아 보여 신뢰가 가지 않았고, 어떤 의사는 이유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졌다. 한편 너무 비싸고 대기 시간이 긴 병원이 있었고, 직원들이 친절한 대신 시설이 열악한 병원이 있었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완벽하게 내 마음에 드는 방법이나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80% 정도 마음에 차는 곳을 만났다면, 이제는 그 병원과 의사를 신뢰해야 한다. ‘뭐, 치료한다고 크게 달라지겠어? 저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알겠어.’와 같은 불신하는 마음은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를 만들어 깊은 대화를 할 수 없다. 이를 내려놓지 못하면, 치료를 위한 유대를 구축하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 지금 다니는 병원은 대기 시간이 길지 않았고, 직원들이 친절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20일 치 약을 지을 수 있고 하루 1회, 자기 전 먹으면 숙면까지 가능했다. 정식 상담은 아니지만 주치의 선생님께서 짬짬이 시간을 내서 짤막한 상담을 해주시는데,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어색했던 적응기를 지나 유대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것 같다. 말을 하다 보면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속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선생님은 진심으로 공감하며 조언해주셨다.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심리적, 종교적, 철학적인 이야기를 선생님은 경청하시고, 학술적인 지식을 보태주시기도 하고 관련된 책을 추천해주시기도 했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추하게 곪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싶은 마음에 언제부터인가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됐다.


천년을 이어온 명상 노하우, 용어가 어렵지만 내용은 유익하다

[ 넷째 걸음 _ ‘조바심’ 내려놓기 ]

상담 치료나 명상 수련을 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마음은 ‘조바심’이다. 성격이 정말로 급한 나는 무슨 방법을 시도하건 간에, ‘언제 나는 괜찮아질까’. ‘과연 괜찮아질 수는 있는 걸까.’ ‘이렇게 시간을 들여봤자 헛수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빨리 비참하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서 자랑스럽고 즐거운 내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컸을 것이다. 괜찮아져야 한다는 강박도 한 몫했다. 더는 손해 보기 싫은 마음에 가성비를 따지게 됐다. 마음공부를 하러 가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떠오르는 마음을 바라보는데, 그런 다급함과 욕심이 둥둥 떠다녀서 다른 마음은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버려야 할 마음이 너무 많은데, 20년 넘게 쌓아둔 마음 세계로 들어가는 표면을 그런 성가신 마음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별 수 있나, 그 ‘조바심’을 버리는 작업을 먼저 충분히 했다.


마음을 놓아버리는 과정과 그 이로움에 대한 책

[ 다섯째 걸음 _ ‘무거움’ 내려놓기 ]

잔챙이 같이 자잘한 마음이 소란스럽게 지나가고 나면, 묵직한 마음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부모님이나 친구, 선생님, 동료, 가까운 사람들과의 골이 깊은 갈등과 상처. 또는 날벼락같았던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정도의 트라우마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게도 큼직한 덩어리가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힐난,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느꼈던 소외감, 회사 동료들에게 받은 멸시, 조증 에피소드가 발현되면서 잃게 된 대인관계. 여러 가지 마음이 엉켜질수록 더 복잡하고 무겁다. 격렬한 감정을 내려놓고 그것을 직면하게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그 무거운 마음을 낱장으로 쪼개서 내려놓게 되는 날에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쾌감이 든다. 이해되지 않던 게 이해되고, 미워했던 것을 미워하지 않게 되고, 깨달음을 준 원수에게 감사하게 된다. 나를 괴롭히던 거대한 마음 덩어리를 내려놓는 순간, 나는 그 마음 없이 사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마음공부를 멈출 수가 없다. 이 부분은 경험해본 분들만 공감하실 것 같다.


[ 여섯째 걸음 _  ‘프레임’ 내려놓기 ]

바깥세상에도 내 세상에도 ‘조울증’이라는 세 글자에는 많은 이미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굳어져있다. 왠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고, 사회에 부적응할 것 같고, 심지어는 부정적인 사건 사고에 연루돼 있을 것 같다. 진단을 받기 전에는 나와 무관한 ‘집단’이라고 생각했기에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을 뿐, 내게도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정신질환 진단명을 받아도, 섣불리 아무에게나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다. 나도 진단을 처음 받은 날에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이후로는, ‘조울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름 똑똑하고 예쁘고 당당했던 내 모습은 이제 끝이 났다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조울증에 대한 세상의 프레임을 내게 덮어 씌우며, 조울증과 나를 동일시하고 스스로에게 실패자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래서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실체가 없는 프레임과 혐오 감정을 먼저 버려야 했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에이즈'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암에 걸린 사람을 '암'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비염에 걸린 사람을 '비염'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나는 조울증 그 자체가 아니라, 조울증을 겪는 사람일 뿐이다. 조울증은 나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의 증상이자 에피소드다.


[ 더 잃을 것도 없을 때, 커밍아웃 ]

“그간 심해진 동료와의 갈등, 감정 기복, 쇼핑 중독 등의 증상으로 볼 때, 조울증이 재발했음을 인정합니다. 친절과 감사가 바닥나 좋은 사람들과 멋진 회사를 미워하기 전에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나의 휴직에 거짓 핑계를 달고 엉뚱한 소문이 무성해지길 원치 않습니다. 잘 이겨낸 시련이자 감수성이자 용기였던 조울증을 숨김없이 사랑합니다.” 휴직 직후, 인스타그램에 가장 솔직한 마음을 알리고 몇 달이 지났다. 가장 큰 건 후련한 마음이었지만 다른 미묘한 감정들도 뒤따랐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뭘까? 사실은 나도 '조울증'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어색하고 긴장이 되는 건 사실이다. 혹여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단정할까 봐, 연민할까 봐, 신기해할까 봐,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줄까 봐.


[ “굳이 왜 밝히려고 그래?” ]

어떤 사람들은 내가 왜 ‘조울증’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자주 쓸까 의아할 것이다. 그것은 첫째, 정신질환에 대한 언급을 쉬쉬하는 게 불편하다. 스스로가 콤플렉스라고 느낀다면 개인적인 비밀로 하는 게 맞지만, 사회 전반에서 ‘소수자의 비밀’로 처리해, 정말 도움을 박아야 할 사람들이 음지로 숨게 될까 봐 걱정된다. 둘째, 정신질환은 더 이상 ‘소수자의 약점’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 트라우마, 콤플렉스, 강박증, 결벽증, 대인기피증, ADHD, 번아웃 증후군, 우울증, 공황장애, 분노조절장애 등 크고 작은 정신질환을 경험한다. 다만 용기를 내서 전문가나 주변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있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참고 넘기는 경우가 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이 비밀로 한다고 해서 나까지 비밀로 하고 싶진 않다. 나는 내 상태를 숨김없이 주변에 알려 더 깊은 이해로,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넷째, 조울증은 잘 이겨낸 나의 시련이다. 조증의 잔재로 남겨진 예민함과 감수성, 용기와 창의력과 나는 공생하기로 했다. 나는 그게 참 싫지만 참 좋다. 다섯째,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입사 당시만 해도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 채용이 취소되거나 부서에서 왕따를 당할까 봐 무서웠지만, 나를 더 알게 된 소중한 휴직기에는 굳이 그런 걱정을 하진 않는다.



[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

유퀴즈에 주호민 작가님이 나와서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 아들이 자폐를 가졌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굳이 알리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있고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다고. 동지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들었다. 이번에는 조세호 님이 “우리가 자폐를 가진 친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라고 질문을 하자, 작가님의 표정이 신중해진다. 일례로 어떤 사람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자폐인들은 한 분야에 특출 나다고 생각해, 자폐 아들에게 “얘는 뭘 잘해요?”라고 느닷없이 물어봤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도 다양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에 여러 가지 당혹감을 느껴봤으리라. 아무리 보호자라도 대답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차별도 특혜도 없이, 그저 평범하게 자연스럽게 대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 사람들은 악의 없이 내 마음을 쿡쿡 건드리고는 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반응은 실례 같아.’라고 생각해둔 게 몇 개 있긴 하다. 하지만 내가 내 조울증이 어려운 만큼, 사람들도 어려우리라. 그리고 내가 콤플렉스로부터 편해졌을 때,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 조울증을 인정하면서, 관리하면서, 소개하면서

'소수자'나 '혐오'란 개념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울타리와 패턴 ] 2022. 7. 14.


차별이 있는 세상에서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가는 건 불가능하다.

미워하는 마음을 모조리 버리다 한들

'더' 좋아하는 마음까지 없앨 수는 없다.

용납할 수 없는 기준이란 것도 있다.


차별이 짙은 세상에서

차별이 얕은 세상으로 가는 건 가능하다.


실제로 우리가 살기 좋다고 얘기하는 선진국은

인종, 국적, 직업, 나이, 성별에 대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작은 경향이 있다.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인정"의 실천으로,

유토피아는 못될 지라도

유토피아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우리의 울타리는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지만

천천히 넓어지거나 낮아질 수는 있다.


좁고 높은 울타리는 보호막이자 감옥이니,

"대충" 미워하고 "열렬히" 사랑하는 편이 낫다.

"열렬히" 미워하고 "대충" 사랑할 필요는 없다.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다리가 불구인 조제는 할머니 밑에서 평생을 숨어 살았지만, 츠네오를 만나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츠네오는 연민도 편견도 없는 가장 순수한 마음을 주지만, 조제는 모든 게 두렵다. 츠네오도 조제도 그냥 사랑에 서툰 소년, 소녀일 뿐인데 '장애'라는 가짜 관념이 진짜 사랑의 '장애'가 된다. 철 없던 츠네오였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고, 조제는 그 사랑으로 평생을 살아갈거다. 아쉽게도 아직은 '장애'라는 말에는 '소외'라는 말이 따라온다. 뿌리 깊게, 은근 슬쩍, 끈질기게. 알게 모르게 굳어진 암묵적인 역속처럼, 조제를 숨기고 억눌렀던 할머니처럼. 하지만 조제가 스스로 바깥 세상으로 나왔듯이, 변화는 이미 시작됐을지 모른다.



[ 마음 탐사대 ]

가장 순수한 보물은 맨 밑에 있다.

열어보지 않거나, 파묻혀 있다면

마치 없는 것처럼 잊고 지내겠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다.



영화 [ 가타카 ] "우열이라는 게 있긴 할까."


최적의 유전자만 조합한 인공수정을 지향하는,

유전자 정보로 사람의 우열을 읽고 판단하는,

소위 '잘난 놈'을 위한 신분제 사회 속에서


자연으로 출생한 '빈센트'의 유전자 정보는

범죄 가능성, 심장 질환과 짧은 수명을 예언하고

그의 유전자 때문인지, 사회적 낙인 때문인지

우주 비행사의 꿈은 멀어져 간다.


그러나 빈센트는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는다.

브로커에게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유진'의

우성 유전자를 받아 '제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머리카락, 지문, 피, 모든 걸 감추고 속이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범죄도 저지르게 되지만,

결국 모두가 안된다고 했던 비행 자격을 얻는다.


기득권층은 '제롬'은 가짜라며 자격이 없다며

그의 실체를 밝히려 위협적인 추격을 했지만,

다른 이에게 '제롬'은 희망의 상징이다.

그가 '반례'이자 '선례'가 되길 기도하며,

그의 위조를 묵살하고 도와준 이들도 있었다.


모든 운명은 DNA에 쓰여서 태어나는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고뇌'하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고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고 말하는

세상의 '우'와 '열'은 누구의 기준인가.

애초에 다양성과 평등을 부정한

불공정한 룰과 출발선이었기에,

우리는 '제롬'의 반칙을 숨죽여 응원하게 된다.


어떤 영역에서는 우리는 타고난 루저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든 그것을 뒤엎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확인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 흑백 논리 ] "마땅한 혐오란 게 있나."


인류사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오류는

'이분법'과 '혐오'를 기반한 '폭력'이다.


우월한 누군가가 열등한 누군가를

지배하고, 약탈하고, 학살한 사례는 많다.


기준이 되는 '명분'은 좀 허무하다.

'다른' 집단에게 '혐오'를 느끼기란 참 쉽다.


알게 모르게 언론과 지식인의 이간질도 섞인다.

"이런 사람과 손절하세요"라는

유튜브에서 한 심리학자의 강연에 놀란 적이 있다.

"나도 피해자다", "이런 인간 부류 극혐"

이라는 댓글이 주렁주렁 달린다.

얼굴을 가리니 혐오는 더 깊고 잦아진다.

 

'피해자', '가해자'를 이분하지 않고야

어떻게 저런 주제를 내세웠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했다.


'똘레랑스(관용)'이라는 단어가 퍼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저 '유행어'가 된 것이지 싶었다.

(물론 실천이 쉬운 개념은 절대 아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나.

혐오받아 마땅한 사람이 있나.

그렇다는 확신에 찬 사람들은

언제나 흑이거나 백일 수 있나.

누군가의 밑에서 마땅한 혐오를 받을 준비가 돼있나.


미워하는 건 자유지만 권장하거나 정당화할 것까지 있나.



영화 [호텔 르완다] "조작된 집단 혐오"


세계사 속에 편 가르기 정치와

집단 혐오, 차별은 수없이 반복됐지만

벨기에의 식민통치를 받은 르완다의 이야기는

어쩐지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있다.


벨기에가 르완다를 점령하고

투치족에게 권력을 부여해

후투족을 학살하도록 하고

벨기에 퇴각으로 투치족이 힘을 잃자

후투족의 반격이 시작된다.


망명과 내전, 대통령 암살과 같은 갈등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매스컴은

그들의 피해의식을 건드리고 이간질한다.

실제로 후투족 정부에서

45cm 큰 칼 50만 자루를 국민들에서 나눠주며

투치족이 눈에 띄면 언제든지 죽이라 선전해

부부, 연인 사이에서도 살인이 일어났다고 한다.


힘의 논리로 합리화된 식민지

이어지는 동족상잔의 비극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보복의 역사에서

잘잘못을 가려내 처벌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당연한 것인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이 폭력을 낳았다는 생각만 선명해진다.


이 영화는 볼 엄두가 안 나지만

언젠가는 봐야 할 것이고

학살의 역사는 직면할 엄두가 안 나지만

언젠가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투치족이 후투족만 탓했다면

후투족이 투치족만 탓했다면

서로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평화협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나라 중에

역사를 공유한 나라 중에

사이가 좋은 나라는 없는 것 같다


+ 전쟁 연도를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들이 어떤 과정으로 실수를 반복하고

어렵게 화해했는지를

교육 과정에서 다뤄야 할 것 같다


영화 [ 더 리더 ] "무지한 사람에게 명령한 대학살"


30대 한나와 10대 마이클은 연인이 되고

마이클은 책을 읽어주고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한나에게만 사랑을 확인하고 마음을 열어간다.


갑자기 한나가 사라지자 마이클은 마음 둘 곳이 없고

몇 년 뒤 재판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목격한다.

법대생 마이클은 유대인 학살 재판 건의

모든 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놓였지만

필적 대조를 거부하는 한나를 보고

그녀가 문맹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나가

안타까웠던 마이클은 책과 녹음본을 보내고

한나는 스스로 공부해 문자를 깨친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깨닫고는

교도소에서 스스로 생을 조용히 마감한다.


마이클은 교도소에서 한나가 모아 온 저금통을

유대인 피해자 단체가 아닌 문맹 지원 단체로 보내고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지난 이야기를

딸아이에게 털어놓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무지로 전범이 된 여인을 안타까워했던,

그 과정에서 마음을 털어놓는 법을 배운 소년


+ 야한 영화인 줄 알았다가

사랑 영화인 줄 알았다가

문맹과 전범 이야기가 나와서 좀 의외였고

무지에서 비롯한 학살이 반복되는 게 안타까웠다

외면받기 쉬운 어려운 주제를 와닿도록

다룬 스토리 전개가 훌륭했다


+ 마이클이 법대생, 한나가 문맹이라는 설정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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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아트페어와 트루먼쇼 ]

31살부터는 조울증의 여파로 넘실대는 마음을 그림에 쏟아냈다. 혼자 그리고 감상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문뜩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졌고, 32살에는 아트페어에 방문하게 됐다. 그런데 NFT 재테크 여파인지, 많은 사람들이 ‘소장 가치’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그림 앞에서 점원이 작가의 학력과 화법을 얘기한다. “현재는 8천만 원이지만, 내년에는 1억까지 뛸 것으로 예상됩니다.” 돈 많아 보이는 사모님이 “아 7천만 원 정도면 좋았을 텐데요.” 어떤 근거로 제시된 가격인지, 솔직히 동의할 수 없었다. 대충 보기에는 반짝 유행할 그림 같은데. 아마 내 안목과 식견이 부족한 탓에 그림의 가치를 몰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내내 액수 얘기만 듣다 보니, 혹시 이 사람들이 내가 입장하기 전에 트루먼쇼처럼 대본을 다 짜 놓은 건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옛날부터 이상했다. 부잣집 자재가 해외 명문 예술대를 나와서 고급 재단에 지원으로 수천만 원을 들여 만든 작품을 만들고, 비평가들이 언론을 통해 특정 아티스트와 작품에 찬사를 보내고, 소비자는 수억을 주고 작품을 사는 과정이 반복됐다. 집안과 재단과 언론과 비평가와 아티스트 사이에 어떤 작용이 있었던 걸까. 마치 예술이라는 영역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고상한 소수를 위한 영역처럼 베일이 씌워졌다. 어째서 작품이 소수의 담론으로 가치를 통보받고, 다시 재벌가의 건물에 소장될까. 주류라는 그들을 제외한 사람들의 방식은 예술이 아닌 걸까. 내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이 종이는 가격을 매기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없는 걸까? 그런 의문과 오기로 나는 내 그림을 집안 곳곳에 걸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limjuhye_0610

[ 시공간의 확장, 인스타그램 ]

"어디까지 온 건지 뒤돌아보면, 저 많은 발자국들 그걸로 됐어. 난 잘하고 있어. 내 삶이니까, 내 길이니까."

-아이유, 김연가가 부른 [ 얼음꽃 ] 중에서 -


투박한 셀프 리모델링이 끝난 집을 둘러보면, 아직도 이게 내 집이 맞는지 얼떨떨하고, 좀 서투른 마감이 부끄럽기도 하다. 건축은 늘 내게 아쉬움이었다. 설계 과제를 할 때도, 공사 감독을 할 때도, 내 집을 고칠 때도, 항상 마지막에는 후회와 미련이 남는다. '페인트 전문가를 부를걸.' '어차피 돈도 없었잖아.', '이런 게 빈티지 감성이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100%는 없고, 안 가본 길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집의 옛날 사진을 보다가 새로운 감회에 잠겼다. 시간에 따른 공간의 나열이 친숙하면서도 낯설게도 느껴진다. 처음 이삿짐을 들인 순간, 철거 고민이 깊어졌던 순간, 철거가 진행되는 순간, 페인트칠하느라 고생한 순간, 가구를 들이는 순간, 내 그림을 거는 순간. 많은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머무는 우리 집이 다시 보인다. "진짜 고생했구나.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나는 지나간 모든 순간을 다시 보고는 우리 집이 더 소중해졌다. 내 인스타그램에는 완벽한 결과물만 자랑하고 싶지 않다. 어설픈 페인트 자국이 없다면 그건 우리 집이 아닐 것이며, 바보 같은 시행착오가 없다면 그건 임주혜가 아닐 것이다.


[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생활 습관 ]

1. 밤새기, 불규칙한 수면

컨디션 난조는 물론 불면증과 소화장애까지 동반한다. 몸이 안좋아지면 마음은 따라서 안좋아진다.

2. 운동 안하고 어두운 곳에 있기

햇빛이 우울증 예방에 효과적이란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햇빛을 쬐며 산책하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전환된다.

3.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혼자 있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죄책감이 커진다.

4. 잘잘못 따지기 (생각으로, 말로, 글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하고 논리를 굳히면 끝도 없는 혐오 감정에 빠져든다.

특히 자신을 탓하고 혐오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5. 유해한 중독(술, 담배, 약, 콘텐츠, 사람, 관계, 음식, 커뮤니티, 생각 등)

6. 갑작스러운 치료 중단, 약 처방 변경

7. 싸움에 개입하거나 휘말리기

특히 조증 에피소드 상태에서는 세상이 난폭하게 느껴지지만, 의외로 내가 난폭해져있는 경우가 있다. 예방 차원에서 감정선과 상관 없이 싸움은 평소에 피하는 게 좋다.

8. 남탓하기, 뒷담하기

갈등 상황을 악화시킨다. 꼭 조울증이 아니더라도 관계나 마음가짐에 전혀 이로울 게 없는 행위다.

9. 사치와 과소비

조증 에피소드 상태에서는 신용카드를 막 쓰게 되니, 평소에 체크카드만 구비해두기를 추천한다.

10. 빠른 완치에 대한 욕심

조바심만 나고 부담감에 오히려 치료가 더뎌진다.

11. 인스타그램으로 타인과 나 비교하기


[ 정신 겅강에 도움이 됐던 생활 습관 ]

1. 작은 목표와 성취

아침에 일어나서 강아지 배변 치우기, 밥주기, 완기시키기, 미숫가루 먹기 등. 정말 사소한 것이라도 일상 곳곳에 루틴을 만들고 지키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2. 좋은 생각과 좋은 사람 가까이 하기

책이든 영상이든 실제 사람이든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가까이 하고 따라하기

3. 허용가능한 사치

맛있는 커피와 케잌, 화사한 가디건, 좋아하는 작가의 책. 비싸지 않더라도 나를 위한 보상을 종종 하자.

4. 인간관계에 욕심 버리기

기대하면 실망도 커진다. 빌려쓴 몸, 스치는 인연이라고 생각하자.

5. 마음 정기 점검

마음이 안좋을 때면 한 번쯤 털어놓자. 꼭 친한 지인이 아니어도 된다. 전문의도 괜찮고 일기장도 괜찮고 SNS 비밀계정도 괜찮다.

6. 용서의 순간 기다리기

억지로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언젠가는 미워하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순간이 올거란 걸 알자.

7. 잘 챙겨먹기

건강한 식단이 건강한 몸을 만들고, 건강한 몸이 건강한 마음에 영향을 준다.

8. 비빌 언덕 만들어놓기

힘들때 마음을 가라앉히는 장소, 생각의 굴레를 끊는 취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운동,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애착 인형, 마음의 도피처를 미리 만들어두자.

9. 훌쩍 떠나는 여행

똑같은 일상이 똑같은 생각을 고착화시면, 마음이 고립되서 증폭되고 반복될 수 있다. 생각의 환기가 필요할 때는 그냥 기차에 몸을 싣어보자.

10. 일기 쓰기

들뜨거나 가라앉았을 때의 상황과 생각, 마음들을 기록하면서 나를 관찰하자. 감정의 중립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11. 도움 청하기

누구라도 좋다.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면, 의외로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 도움 받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12. 백과사전 읽어보기

자신의 병의 원인과 치료법, 증상 등을 꼼꼼히 공부해두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잘 컨트롤 할 수 있다.

13. 허용가능한 만큼만 커밍아웃

수치심에 병을 비밀로 하는 사람이 많다. 밝히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내 경우에는 커밍아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숨길 게 없어 홀가분 했고 그간 쌓였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므로, 밝히는 게 좋다 나쁘다 규정할 수 없으니 본인이 잘 생각해서 결정했으면 좋겠다.

14. 혼자 있는 것도 괜찮고 동물과 있는 것도 괜찮다.

사람을 대하는 게 불편한 순간에는 혼자 있는 것도 괜찮다. 혼자 있는 게 어렵다면 강아지의 온기를 느끼는 것도 위로가 된다.

15. 무기력할 때는 사소한 몸짓을

밀린 설거지, 화분에 물주기, 거울 닦기, 손발톱 깎기, 반려견 쓰다듬기, 오디오북 듣기, 일기 쓰기, 공원 산책, 쉼호흡과 명상, 앞머리 자르기, 밀키트 요리, 뭐든 좋다. 사소한 움직일 계획을 실천해서 자기 효능감을 찾자.

16. 정신적 롤모델 찾기

이미 세상에는 많은 영적 스승이 삶을 살다갔다. 사고를 겪고도, 친지의 죽음을 겪고도, 암나 정신질환을 겪고도, 그 시련을 밑거름 삼아 영적 성장과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다. 속는 셈 치고 그들의 말을 한 번 믿어보자. 영앤리치 인스타셀럽보다 100배는 유익하다고 장담한다. 잘 이겨년 시련만큼 단단하게 빛나는 것은 없다.

17. 독서

동영상에는 담을 수 없는 깊은 이야기가 있다. 정독하는 게 지루하면 발췌독, 편독, 오디오북, 전자책 뭐든 조금이라도 시도해보자. 훌륭한 정신적 지주는 언제 어디든 있다. 다만 우리가 아직 그들을 만나지 못했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18. 운동화를 신자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크다해도 격하거나 무리한 운동, 극단적인 식단은 지속하기가 어렵다. 그보다는 평소에 슬리퍼나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어보자. 두 정류장 정도는 걸어다녀보자. 해가 뜬 시간에 공원을 두번 정도 다녀오자.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화가 필수다. 적응만 되면 하루종일 걸어도 허리와 다리가 아프지 않다. 반면 발이 불편하면 온갖 핑계를 대고 집에 돌아오게 된다.

이승희 저 [ 기록의 쓸모 ] 중에서

[ 예술에 조울증을 이용하지 않겠다 ]

타고 난 손재주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떤 분야에서 크게 인정을 받아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뛰어난 창작물로 대중의 인정을 받아보고 싶은 욕심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건축학과를 다니는 동안에는 열정을 넘어선 집착과 광기로 매번 설계 과제에 임했다. 그림을 다시 시작한 31살에도, 글을 쓰기 시작한 32살에도, 한번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이왕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 때문일지 모르지만, 심지어는 내 감정기복과 조울증을 이용하기도 했다. 감수성이 짙어지는 밤에 일부러 잠을 안자는 올빼미 생활을 하고, 아픈 기억을 다시 헤집고 옛날 감정에 푹 젖은 상태로 영감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럴수록 몸과 마음의 건강만 망칠 뿐, 영감은 닿을듯 말듯 멀어져갔다. 조울증을 이용해서 얻은 글은 치명적이고 극적일 수는 있지만, 필자를 위험으로 몰아넣기에 지속하기는 어렵다. 고통을 글로 승화하려던게, 글을 쓰려고 고통을 쥐어짜는 형태의 주객전도가 되기도 한다.


결국은 영혼까지 팔아서 억지로 작품성을 끌어내자는 욕심을 버렸다. '당장에 대중에게 인정받아서 뭐할건가! 그런 안달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못해!' 하며 허영심도 인정했다. 그러자 자연스러운 마음이 다시 차올랐다. 좋은 마음, 싫은 마음, 그저그런 마음, 나는 소탈하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의미가 없어도 좋고, 누가 읽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하고. 어떤 날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다른 날은 헤어나오지 못하는 슬픔을, 차곡차곡 써내려갔다.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마음이 담겼다. '영감은 내가 구걸한다고 오는 게 아니었구나.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때가 돼서 흘러넘치면 받아적는 일이었구나.' 그리고 나는 엉뚱한 힘을 뺄 수 있었다. 그런 받아쓰기도 평소 건강하고 행복한 몸을 가꾸어야 해낼 힘이 생긴다. 그리고 이제는 아티스트, 작가, 예술, 크리에이터와 같은 단어에 무게를 싣지 않기로 했다. 그런 타이틀로 내 존재를 인정하는데 길들여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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