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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이 Jan 03. 2022

아이와 결혼에 대하여(설거지론)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용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연남책방 / 이진우 옮김 / 1부 / 20. 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 p130-133.


(필자는 철학 전공자가 아님. 번역본을 읽었고, 여러 작가/유튜버의 해설을 참고하여 읽음.)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산문시'로 니체의 중심사상 들을 주제별로, 책의 기하적(?) 구성(낙타에서 사자에서 아이로 남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자, 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자, 나로서 즐기는 자로의 변화)에 따라 잘 나타낸 책이라고 하지만 다독했음에도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니체는 당시 유럽에 팽배해 있던 허무주의에 대하여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오히려 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길 바랐던 것 같다. 억겁의 시간을 지나 지금의 내 삶은 회귀된 다른 존재의 삶일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사는 삶을 억겁의 시간 후 또 다른 존재(나?)도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삶의 목적(또 다른 나에게 같은 고통을 줄 수 있다.)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이 진실(진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삶의 주인(도덕)으로서 가치관만 가질 수 있다면, 그래서 더 나은 자아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사상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사상인 것이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김연자(작사가 이건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면 좋을지 이미 노래한 가수(작사가 이건우)가 있다. 아모르(LOVE) 파티(FATE)로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노래다. 최근에 다시 회자된 노래지만 '왔다 갈 한번의 인생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어쩌면 물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에서 지쳐 허무함에 빠져버린 오른 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큰 용기를 주는 말이라고 본다. 허무주의에 빠져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의식을 끌어올려 어떤 방면에서든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만들어보자(좀 더 위버맨시에 다가가자)는 니체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최근 인간관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에 대하여 '설거지론'이라는 단어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요한 것 자체가 그 이론에 대하여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거나 당사자라는 것이다. 결혼은 기본적으로 '조건(스펙)'보다 '사랑'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아하고 사랑하기 까지 내가 그 이성을 좋아할만한 여러 조건이 필요하고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부부 서로서로가 끊임없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면서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서로를 존경(존중)할 수 있는 인간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인허가 업무를 하다보면 영업자들이 많은 착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리행위 등을 하기 위해 법령에서 규정하고 있는 인허가를 득하는 것은 그 영리행위의 시작점(완성이 아니다.)이다. 모든 조건에 맞춰서 해당 영리행위를 할 수 있는 허가를 득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허가를 득했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허가의 제반사항을 보면 '~법 준수'라는 조건이 있다. 법에서 정하고 있는 해당 영리행위의 준수사항을 지켰을 때 그 허가를 유지해주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행정처분을 받거나 고발을 당하게 된다.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다. 결혼도 이와 같다. 결혼 전에도 상대에게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태도가 있을 것이고 결혼 후에는 그것이 서로 더 조심스러워져야 할 것이다. 결혼을 했기때문에 막연하게 서로를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다거나 서로의 재물을 쓰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고린도전서 13장 중

위는 바울이 여러 다른 활동에 집중하면서 참된 가치를 잊은 고린도교회에 전한 편지의 내용이다. 윗부분은 기독교의 핵심가치와 실천사항이지만 이것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한다. 칸트는 자선행위에서 내가 뿌듯함을 느낀다면 그 자선행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아주 강경한 입장(그 자선행위에서 자신이 정신적 만족을 포함하여 아무것도 취하는 것이 없을 때 계속하는 자선이 진정한 자선이라고 주장)을 취하는 철학자인데, 나는 위에서 바울이 말한 사랑과 칸트가 말하는 자기만족은 분명 다른 일이라고 본다.


아래는 정확한 사랑의 정의는 아니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이 보이는 태도에 대해 쓴 내용이다. 한 번이라도 내가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에게 저러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임한적이 있는가? 니체는 육욕, 지배욕, 이기심을 세 가지 악으로 정의(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도 다루고 싶다.)했다. 육욕은 누구나 가진 것이지만 사랑이 없는 육욕은 또 다른 불행을 낳을 뿐이다. 서로를 육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거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그 한정된 욕망안에 가두어 버린다. 요즘 뉴스에서 자주 보이는 영아 관련된 악한 행동들은 여기서 기반한다고 본다. (제발, 피임 어렵지 않다.)


이제 니체가 결혼과 아이에 대하여 쓴 내용을 살펴보자. (니체는 영혼회귀 사상을 통해 사람들이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나의 형제여, 그대에게만 묻고 싶은게 하나 있다. 그대의 영혼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려고 나는 이 물음을 측심연을 내리듯 그대의 영혼 속으로 던진다. 그대는 젊고, 아이와 결혼을 원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아이를 원해도 될 만한 인간인가?


나는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승리한 자, 자기를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아니면 그대의 소망에는 짐승과 절박한 욕구가 들어 있는가? 아니면 고독 때문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불화 때문인가?


나는 그대의 승리와 그대의 자유가 아이를 갈망하기를 바란다. 그대는 자신의 승리와 해방을 기리기 위해 살아 있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어서 자신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대는 우선 그대의 몸과 영혼을 반듯하게 세워야 한다. 그대는 앞으로만 번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위로도 번식해야 한다!(능동적 허무주의에서 니체는 정신의 상승을 말했다. 창조하는 자의 결혼은 그렇게 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결혼이라는 정원이 그대를 도와주리라!


그대는 더욱 숭고한 몸을, 최초의 움직임을, 스스로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창조해야 한다. 그대는 창조하는 자를 창조해야 한다. 결혼, 창조한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 하나를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를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를 실현하는 상대방에 대한 외경심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대가 말하는 결혼의 의미이고 진리이기를 바란다.


결혼을 하면 자신의 삶을 잃는다. 결혼하기 전에 하고 싶은거 해라. 많은 사람들에 사랑에 대해 잘못 알기 때문에 결혼해서 있어지는 행동들이 자신의 삶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서로의 부모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희생에 대해 칭송받기를 바라고 대가를 받기를 바란다. 지금의 우리는 받는 것에만 너무 익숙해 지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고, 내가 준 것만 기억하고 내 평가가 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 어떻게든 그것을 이용해 타인을 몰아세우고 편취하고 싶어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고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니체는 말했다. '그대는 아이를 원해도 될 만한 인간인가?', '그대는 승리한자, 자기를 제압한 자, 관능의 지배자, 자신의 덕의 주인인가?' 니체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밖에서는 무시당해도 나는 내 아이와 내 아내(남편)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서로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인간으로서 대우하고 험한 사회의 풍파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나보다 나은 나의 아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많고 많은 사람, 쓸모없는 이 영여 인간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나는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아, 짝을 지은 두 영혼의 빈곤함이여! 아, 짝을 지은 두 영혼의 더러움이여! 아, 짝을 지은 두 영혼의 가련한 안락함이여!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결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결혼이 하늘에서 맺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하늘을, 쓸모없는 잉여 인간들이 말하는 이러한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짐승들을, 하늘의 그물에 걸려 있는 이러한 짐승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짝지어주지도 않았으면서 축복하려고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신도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라!


하지만 이러한 결혼을 비웃지 마라! 자신의 부모를 위해 울어야 할 이유를 가지지 않은 아아가 어디 있겠는가? 이 남자는 내게 품위 있어 보였고, 대지의 의미를 알 만큼 성숙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를 보는 순간 대지는 나에게 정신병원으로 보였다. 그렇다. 성자와 거위가 서로 짝을 이룰 때 나는 대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기를 바랐다. 이 성자는 마치 영웅처럼 진리를 찾아 나섰으나, 결국 화려하게 치장한 하나의 작은 거짓말을 손에 넣었을 뿐이다. 그는 이것을 결혼이라고 부른다. 그는 교제에 신중했으며 까다롭게 골랐다. 그러나 그는 단번에 그의 교제를 영원히 망쳐버렸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결혼이라고 부른다.


그는 천사의 미덕을 지닌 시녀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단번에 한 여자의 시종이 되었고, 이제는 그것을 넘어 자기 자신이 천사가 되어야 할 판이다. 나는 이제 모든 구매자가 신중하며, 그들 모두가 교활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가장 교활한 구매자조차 자기 아내를 살 때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자루째 산다. 잠시 동안의 수많은 어리석은 행위들, 그대들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대들의 결혼은 잠시 동안의 수많은 어리석은 행위를 끝내는 하나의 긴 어리석음이다.


여자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과 남자에 대한 여자의 사랑. 아, 부디 이러한 사랑이 고뇌하는 숨겨진 신들에 대한 동정이었으면! 그러나 대게는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알아볼 뿐이다. 하지만 그대들에게 있어 최선의 사랑도 한갓 황홀한 비유이자 고통스러운 격정일 뿐이다.


이 파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현상황을 잘 묘사해 놓았는데, 1880년경에 쓰인 글이라는 것을 감안 했을때 왜 철학이, 고전(클래식)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 고민하는 것이 똑같다는 것이다. 남자가 어떻고 여자가 어떻고의 문제가 아니다. 짝을 정하고 결혼을 하는데 있어 너무 신중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 순간 나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외모가 출중하고 인기가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 내가 결혼하기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진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사랑을 줄 줄 알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이것이 나를 사랑해서 하는 행동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의 가치도, 내가 지금 사랑하는 척 하는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인지, 진짜 사랑을 받는 것인지 구분할 줄 모른다. '오마르의 삶'이라는 유튜버의 영상중에 '부모님 말 다 듣지마세요.'라는 영상이있다.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에서는 이 제목을 보고 급발진, 극대노하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보통 부모님말 더 안 듣지. 보통 자기랑 관련 없으면 아예 무관심하다. 키 180cm인 사람 키 작다고 놀려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 유튜버가 이야기 한 내용은 이것이다. 자신의 친구들이 부모님이 되었는데, 애네는 지금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도 가보지 못했던 길, 자기도 어떻게 가야하는 지 모르는 길(본인은 공부안(못)했는데 아이는 학원을 10개정도 보내면서 내가 너처럼 밀어줬으면 공부를 잘했을 것이라고 함.)을 너무 무책임하게 자신의 아이가 걷게하려 하고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 한 아이는 자라서도 사랑을 주는 방법도 모르고 사랑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을 준다고 착각하고 결혼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결혼은 서로에게 고통이다.


설거지론에서 퐁퐁남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대부분 남중-남고-공대-이과계열 대기업에 취업한 이성 친구 한 번 사귀어보지 못했던 남자가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여 월 5~30만원 안팎의 용돈을 받으며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자신을 눈에 차지 않아하는 아내와 살고 있는 남자를 말한다. 그는 천사의 미덕을 지닌 시녀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단번에 한 여자의 시종이 되었고, 이제는 그것을 넘어 자기 자신이 천사가 되어야 할 판이다. 결혼할 때 잘못된 마음가짐과 실제로 살았을 때 겪게 되는 일을 적은 것인데, 지금이나 140년 전이나 성숙하지 않은 사람끼리의 결혼은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딸이 비혼을 결심하는 이유중에 상당한 요인이 집안 분위기라고 한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딸들은 크게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나는 '저렇게 살 바에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이고 하나는 '남자들 수준은 그냥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 자기가 아는 것 만으로 밖에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팔자를 스스로 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더 노력하고 사람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분명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삶(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을 살 수 있다. 아이에게도 더 나은 세상을 주고 그 아이는 세상에 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포기하지 말자.


사랑은 그대들이 나아갈 보다 고귀한 길을 비추어주어야 하는 횃불이다. 그대들은 언젠가는 자신을 넘어서서 사랑해야만 한다! 그러니 우선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리고 그 때문에 그대들은 사랑의 쓰디쓴 잔을 마셔야 한다. 최선의 사랑이라는 잔에도 쓴맛은 있다. 그리하여 이 사랑은 초인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키며, 그대 창조하는 자를 목마르게 한다!


창조하는 자의 목마름, 초인을 향한 화살과 동경. 말하라, 나의 형제여, 이것이 결혼에 대한 그대의 의지인가?

나는 이러한 의지와 이러한 결혼을 신성하다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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