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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자연 Jha Eon Haa Mar 27. 2024

파묘와 무덤에 대한 권리

대법원 2017. 1. 19. 선고 2013다17292 전원합의체 판결

1. 삽으로 묘를 팔 때마다, 칼로 돼지 사체를 할퀸다


최민식 배우가 흙을 조금 집어 곰곰이 맛을 본다. 흰색 장갑을 낀 유해진이 손짓을 보내자, 일꾼들은 삽질을 시작한다. 삽으로 묘를 한 번 찌를 때마다, 벼른 칼로 돼지 사체를 할퀸다. 문신을 가득 한 이도현이 북을 치며 굿판의 기운을 돋우고, 자주색 르메르 코트를 입은 김고은은 예민하게 상황을 살핀다.



예고편 속 파묘의 인물들은 전형적이지 않으면서 설득력이 있었다. 파묘의 배우들은 보통 풍수지리사나 무당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다르면서도, 정말 각자의 인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인물들의 느낌이 과하지 않고, 동시에 호기심을 자아냈다.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배우분들이 굿판을 벌이고, 묘를 파는 장면을 구경하고 싶었달까?


예고편을 보고 호기심이 들어 파묘를 보았다(우리나라에서 굿은 무속신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연희적 요소도 있다는데, 그 명맥이 현대의 방식으로 이어진 것일수도!).


박 씨 가문의 장손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고, 박지용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당 이화림(김고은 역)과 윤봉길(이도현 역)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화림은 묫바람(조상의 묫자리가 좋지 않아 후손이 해를 입는 것)이 났다고 판단하고, 풍수지리사 김상덕(최민식 역)과 염장이 고영근(유해진 역)에게 박지용 조상의 묘를 정리하는 일을 제안한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묘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공포스러운 일들이 생긴다.


장재현 감독의 파묘는 이야기보다 인물들의 매력이 훨씬 큰 영화였다. 그리고 무덤이라는 소재가 주는 직관적인 공포, 한국 무속신앙의 낯설면서도 친숙한 느낌 등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다소 산만했고, 마지막 두 챕터는 하나로 합쳐도 괜찮았을 것 같다. 약간 '피식'한 장면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볼만한 영화였다.


2. 우리나라에 65점짜리 묫자리만 남게 된 사정


영화에서 지관 김상덕은 단골 고객에게 좋은 묫자리를 싸게 봐주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에 미심쩍은 고영근이 김상덕에게 추궁을 하자, 지관은 의뢰인에게 좋은 터라고 소개한 곳이 사실은 65점짜리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명당은 모두 씨가 말랐고, 남아있는 곳이 몇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국토는 유한하고, 한국인들은 예부터 매장 방식의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명당이 부족한 문제 말고도 묘와 관련하여 여러 분쟁이 일어났다. 특히 남의 토지에 묘를 만든 경우, 후손들의 무덤에 대한 권리와 땅 주인의 토지소유권이 서로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선시대에는 산림공유(山林公有)의 원칙에 따라 분묘가 주로 설치되던 산림에 대하여는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산지(山地)에 분묘가 설치되면, 그 분묘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이른바 ‘묘지 점권’ 또는 ‘분묘 점권’이라는 사적 점유권의 형태로 보호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근대적인 의미의 임야소유제도가 형성되면서, 타인의 토지 위에 설치된 분묘에 관하여 법률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법원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매장 중심의 장묘문화와, 분묘의 수호와 봉사를 위해 토지 사용을 인정해 주던 관습을 근거로, 분묘를 소유하기 위한 토지 사용권인 분묘기지권을 인정하였다.


[2013다17292 전원합의체 판결 - 무덤에 대한 권리가 인정된 사회적 배경]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조상을 높이 숭배하였고, 이러한 조상숭배사상의 영향으로 좋은 장소를 찾아서 조상의 분묘를 설치하고, 그곳을 조상의 시신이나 유골뿐만 아니라 영혼이 자리 잡고 있는 경건한 곳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자손들은 물론 보통사람들도 이를 존엄한 장소로서 존중해야 하며 함부로 훼손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부모에 대한 효사상이나 조상숭배사상을 중시하는 전통문화의 영향이 남아있는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장묘(葬墓)의 방법은 시신이나 유골을 땅에 묻는 ‘매장’이었다.

... 과거에는 종산 등을 가지고 있던 경우 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묘를 설치할 장소를 소유하지 못하였고, 서구사회에서 발달된 공동묘지나 종교단체가 제공하는 묘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매장 중심의 장묘문화가 널리 퍼져있었던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임야에 조상의 시신을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통상의 분묘설치의 관행 또는 실태를 보면, 분묘를 설치하는 자는 토지 소유자로부터 명시적이거나 최소한 묵시적인 승낙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타인 소유의 토지에 분묘를 설치할 때에 계약서 등 근거자료를 작성하거나 이를 남겨놓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분묘기지권의 시효취득에 관한 대법원판례는 토지 소유자가 바뀌는 등으로 분묘설치 당시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당사자 사이에 분묘굴이를 요구하는 등의 시비가 생기는 경우에 분묘기지권을 주장하는 자가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빈발하므로 이러한 애로를 해소해 주는 측면이 있고, 그것이 취득시효제도의 존재이유에 부합함은 당연하다.


3. 분묘기지권의 의미와 장사법의 시행


구체적으로 분묘기지권이란, 분묘를 수호하고 봉제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범위 내에서 타인 소유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고 토지 소유자나 제삼자의 방해를 배제할 수 있는 관습상의 물권이다(대법원 1994. 12. 23. 선고 94다15530 판결, 대법원 2011. 11. 10. 선고 2011다63017, 63024 판결 등 참조). 이때 분묘란, 그 내부에 사람의 유골, 유해, 유발 등 시신을 매장하여 사자(死者)를 안장한 장소를 말한다(대법원 1991. 10. 25. 선고 91다18040 판결 등 참조).


분묘기지권의 내용과 관련하여, 타인 소유의 토지에 소유자의 승낙을 받아 분묘를 설치한 경우 분묘기지권을 취득하고, 분묘를 설치한 사람이 토지를 양도한 경우에 분묘를 이장하겠다는 특약을 하지 않는 한 분묘기지권을 취득한다. 그리고 타인 소유의 토지에 소유자의 승낙 없이 분묘를 설치한 경우에도 20년간 평온, 공연하게 그 분묘의 기지를 점유하면 지상권과 유사한 관습상의 물권인 분묘기지권을 시효로 취득하고, 이를 등기 없이 제삼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판례).


한편 토지소유권의 중요성이 과거보다 커지고, 매장 중심의 장례문화가 많이 바뀌면서, 관습상으로 인정되던 분묘기지권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장사등에관한법률(장사법)이 개정되어, 2001. 1. 13. 이후 최초로 설치된 분묘부터 분묘의 설치기간을 최장 60년으로 제한하고, 분묘 연고자가 토지 소유자의 승낙 없이 설치된 분묘에 대한 토지 사용권 등을 주장할 수 없다는 내용의 규정이 생겼다. 그리고 분묘기지권을 가진 사람이더라도 토지 소유권자에게 그 지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례도 선고되었다. 즉 무덤에 대한 관습법이 사회가 변화하면서 수정된 것이다 [단, 2001. 1. 13. 이전에 설치된 분묘는 그대로 분묘기지권이 인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도 토지 소유자에게 토지사용료는 지급하여야 한다(대법원 2021. 4. 29. 선고 2017다228007 전원합의체 판결)].


장사법 제27조(타인의 토지 등에 설치된 분묘 등의 처리 등) ① 토지 소유자(점유자나 그 밖의 관리인을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 묘지 설치자 또는 연고자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분묘에 대하여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분묘를 관할하는 시장등의 허가를 받아 분묘에 매장된 시신 또는 유골을 개장할 수 있다.

1. 토지 소유자의 승낙 없이 해당 토지에 설치한 분묘

2. 묘지 설치자 또는 연고자의 승낙 없이 해당 묘지에 설치한 분묘

② 토지 소유자, 묘지 설치자 또는 연고자는 제1항에 따른 개장을 하려면 미리 3개월 이상의 기간을 정하여 그 뜻을 해당 분묘의 설치자 또는 연고자에게 알려야 한다. 다만, 해당 분묘의 연고자를 알 수 없으면 그 뜻을 공고하여야 하며, 공고기간 종료 후에도 분묘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화장한 후에 유골을 일정 기간 봉안하였다가 처리하여야 하고, 이 사실을 관할 시장등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③ 제1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분묘의 연고자는 해당 토지 소유자, 묘지 설치자 또는 연고자에게 토지 사용권이나 그 밖에 분묘의 보존을 위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4. 바스쿠 다 가마의 무덤을 보고


개정된 장사법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후 60년까지 이 세상에 자리를 가질 수 있다. 역사에 기록된 사람이라면 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포르투갈 여행을 가서 바스쿠 다 가마의 무덤을 보았다. 바스쿠 다 가마는 한 국가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탐험가이다. 그는 포르투갈의 전성기가 그대로 담긴, 아름다운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었다. 앞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은 리스본 여행을 가면,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들리고 바스쿠 다 가마의 무덤도 볼 것이다.


바스쿠 다 가마는 죽어서 500년이 지난 현재까지(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 세상에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 그는 오늘날까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전 세계인들을 만날 수 있어 기쁠까? 아니면 이제는 좀 더 조용한 곳에서 편히 쉬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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