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jury time Sep 04. 2023

설마, 여자를 안았을까

#5

주말이었다. 현민은 가족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 시간에 집을 빠져나와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그리고 종로 3가에 익숙하게 내려 여기저기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오빠!"

등 뒤에서 얼굴이 뽀얗고 키가 작달막한 소녀 지호가 현민의 옆구리를 찌르며 헤헤 웃어댔다. 현민은 지호를 보자마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가워했다. 그들은 그리고 어깨를 바짝 감싸 안고 쌈지길 안으로 사라졌다.


아침부터 아들이 보이지 않자 자경은 불길한 심정으로 여러 번 아들에게 전화연결을 시도했다.

"아침부터 어딜 간 거야?"

"여자친구 만나러 서울 왔어요. 이따 저녁에 갈 거야."

현민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할 말만 하고 툭,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경은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부터 여자친구들을 관리해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너그럽게 이해한 게 잘못이었다. 마냥 인기 많은 아들이 귀엽고 조금은 뿌듯한 생각도 들었었다. 자경의 자만이었다.

현민과의 통화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다시 연결되었다.

"엄마, 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너, 무슨 소리야?"

"여자친구 집에 데려다줬는데 집에 가는 차가 끊겼어."

"여자친구 집이라니!"

"응. 얘네 집. 포천이야. 끊어, 끊어, 끊어."

현민이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현민아, 김현민!"

자경이 안방에서 소리를 지르며 통화를 하자 남편이 무슨 일이냐며 달려온다.

"당신 아들이 여자 친구집에서 자고 내일 온대. 거기가 포천이야. 포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정신을 차려보지만 좀체 자경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미친놈. 정신이 나갔구먼. 뭐 지가 다 큰 줄 알고. 아휴, 미친 새끼."

자경의 남편도 착잡한 심정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그리고는 거실로 나가 늦은 밤 티브이 볼륨을 크게 올리고 남편은 소주병을 땄다.


자경이 포천에 도착한 건 새벽 1시가 넘어서였다. 자경의 남편은 이미 술에 취해 자포자기로 들어 누워버렸지만 자경은 도통 가슴이 두근거려 집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차량이 많지 않은 새벽 시간대라 포천까지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초행길에 늦은 밤이라 차들이 정말 쌩쌩 지나쳤다. 자경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며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가는 동안 내내 현민에게 전화를 했다.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경은 무턱대고 포천 시외버스터미널 근처를 배회했다. 포천의 낡은 시외버스터미널은 새벽으로 깊어질수록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어둡고 조용했다. 그리고 끝내 아들의 전화기 전원이 꺼지는 상황이 되자 자경은 포기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경은 내가 그동안 무슨 일을 저질렀나, 아들이 이렇게 막가는 상황까지 오게 내버려 뒀다는 자책에 괴로워했다. 자식은 엄마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는다는 어느 현자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현자는 부모 중 특히 엄마가 행복하고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어야 자식들도 바르게 자란다고 했다. 왜 하필, 엄마란 말인가. 자경은 늘 불안하고 예민한, 차갑고 여린 성격으로 특히 지극히 염세적인 여자였다.

'나 같은 건 자식을 낳지 말았어야 해.'

자경의 죄책감은 극에 달해갔다.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야 현민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현민을 보자마자 앞산이나 올라갔다 온다며 등산화를 고쳐 매고 나가고, 자경만이 아들을 지켜봤다.

"배고파요. 이거 먹으면 돼요?"

현민이 주방에 있는 카레냄비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어제 엄마, 포천까지 갔다 왔어. 엄마 연락 왜 안 받았니?"

"거기까지 왔었어요? 몰랐지."

현민은 밥 한 덩이에 차갑게 식은 카레를 담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얘기 좀 하자."

카레라이스를 다 먹을 즈음 자경은 아들의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현민은 빈 카레그릇을 주방에 갖다 놓더니 피곤하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로 들어가 버렸다.


설마 아들이 벌써 여자를 안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으로 자경은 손발 묶인 채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계속



이전 05화 결국, 어리기만 한 연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