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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Oct 08. 2023

단편소설/장님 고양이 10.

용기를 내야 할 때

그들은 꽃시장 방향 승강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종서는 팔꿈치를 내어주며 명동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어두운 길에서 눈에 띄어야 한다며 새하얀 가방을 사고, 그가 좋아하는 메뉴인 일본식 돈가스를 찾아 헤맸다. 자리를 잡아 의자를 빼주어야 했고 그를 조심히 앉혀야 했고, 종서와 나란히 앉아야 했다. 돈가스는 조각조각 잘라 놔줘야 했고, 포크를 손에 쥐어줘야 했다. 단무지는 콕 집어서 입에 넣어줘야 했고, 입 언저리에 묻은 소스를 닦으라며 티슈를 손에 쥐어줘야 했다. 아인은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듯했다. 여리고 여린 종서는 그가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먼저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다녔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게 익숙지 않았던 종서는 자주 그를 놓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저기 가보자, 이거 어때, 여기 조심해, 하면서 손가락질로 어이없는 말들을 하며 둘은 헤매고 헤맸다. 덜컹거리는 사당행 지하철 장애인석에 앉은 아인은 투덜거렸다.


"씨발, 아무것도 안 보여. 내 눈, 장님 눈처럼 쪼그라들었어?"

"아니야. 멀쩡해. 누가 보면 그냥 멋 내려고 쓴 선글라스인 줄 알 거야."

"이 가방, 이상한 거 아니지? 아이 씨발, 눈이 안 보이니 알 도리가 있나? 이 오빠는 우리 종서 센스만 믿는다. 씨발."


지하철 창문에 기대 서있던 중년 아줌마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더니 아인과 종서를 안경너머 의아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아인은 여전히 거칠었고, 행동은 느려졌고, 말은 많아졌고, 몸에서는 병자의 냄새가 났으며, 얼굴과 손가락은 노래졌고, 손가락과 목덜미의 문신은 힘없이 쭈그레졌다. 그리고 그는 종서에게 유난히 바짝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 그는 그녀가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날이 늘어났다. 주말이면 터미널로 찾아오는 아인을 데리고 산책을 다녔다. 아프고 난 후로 그는 종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았다. 자신이 필요한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결혼을 하고 욕심 없이 같이 살아도 될 것 같은 용기도 조금 생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아인을 당당히 소개할 용기는 좀체 생겨나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녀의 자취방에 방문한다 하면 부리나케 아인을 근처 모텔로 숨겨야만 했고, 그런 수고로움에 점점 지쳐갔다. 용기를 내야 할 때마다, 그동안 헤어졌었어야 했던 수많은 일들이 종서의 기억 저편에서 바글바글 기어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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