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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Oct 08. 2023

단편소설/장님 고양이 9.

운명의 개떡 같은 수레바퀴

종서는 담담히 그날 출근을 하지 않고 그가 떠난 자리의 흔적을 꼼꼼히 지워나갔다. 별 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오늘이 그와의 마지막 날이길 바랐다. 다시는 만나지 않고 헤어지리라 다짐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흔적을 지웠다.

아인이 놓고 간 스케치북에는 그가 스케치한 숲과 동굴, 그리고 종서의 모습이 점묘화로 가득했다. 흔들리고 싶지 않아 그대로 아인의 가방에 그것들을 쑤셔 박아 넣었다. 커플 찻잔과 그의 수저와 칫솔과 오래된 면도기와 낡은 운동화와 늘어난 속옷과 양말을 버렸다. 그가 먹다 둔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버리고, 그가 좋아해서 자주 해 먹던 두부조림을 버리고, 궁상맞게 뜯어먹던 식은 피자도 버렸다. 그는 식은 피자 먹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어젯밤까지 베고 잤던 땀에 찌든 베개까지 버렸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이불과 패드를 세탁기에 넣고 이불 빨래를 돌렸다. 가을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모든 지리멸렬한 기억을 싣고 나갔다. 종서는 충분히 다시 태어날 준비가 된 듯했다.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하지만 종서는 결국,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후, 아인의 친구에게서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고열과 함께 찾아온 바이러스는 아인의 시신경에 손상을 입혔다고 한다. 그동안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장기간 벽화를 그린 아인은 이미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그림에 비해 더 많은 시간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야외 점묘화 작업은 결국 아인에게 씻을 수 없는 타격을 가했다. 손상된 시신경에 바이러스 감염은 아인의 눈에 치명적이었다. 아인은 자신의 몸을 무책임하게 돌아보지도 않고 방치하고 망가뜨렸다. 마치 종서에게 한 것처럼.


며칠을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서 보냈다고 했다. 겨우 의식은 회복되었으나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고 그의 친구는 전해왔다. 병원으로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웬일인지 그는 종서를 보지 않겠다고 했다. 종서는 자주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 앉아 그날을 되짚으며 어지러움에 흔들렸다. 운명의 개떡 같은 수레바퀴는 그렇게 종서를 또 한 번 흔들어놓았다. 그리고 결국 생의 마지막에 시력을 거의 상실한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처럼 아인은 그렇게 붓을 놓아야만 했다.   

        

큰 해일이 덮친 후 폐허에서 일어나 다시 한걸음, 한걸음 혼자 서기를 해나가는 종서에게 일 년쯤 지난 어떤 날, 아인이 뜻밖에 연락을 해왔다.


"잘 지내냐? 이번 주 주말에 서울 갈까 하는데 터미널로 좀 나와 줄래? 서울 가서 뭐 살 거도 있고 좀 돌아다니고 싶어. 어머니가 버스 태워주신대"


아인은 종서를 다시 찾았다. 그는 장애인 복지관에 다니면서 조금씩 적응하고 있다고 했고 복지관에 매고 다닐 배낭을 사러 가자고 했다. 사소한 구실로 그들은 다시 만났다.


한참 만에 마주한 그는 정말 멀쩡해 보였다. 몇 달 고생하다 이제는 다시 보이게 됐다고 아인이 맑은 눈동자로 달려와 소리칠 것만 같았다. 종서는 정말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시신경은 완전히 죽어버렸고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밉게도 잘만 돌아갔다. 그렇게 그들의 불행은 준비할 겨를 없이 찾아왔다. 종서는 그날 밤새 자신을 찾는 아인을 외면하고 나가보지 못한 것을 내내 후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런 죄책감으로 그를 다시 안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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