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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Aug 20. 2024

매일 새벽 글을 쓰는 이유

선택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승진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다. 대학에서 떨어진 누군가가 있다. 취업에 낙방한 누군가가 있다. 결혼을 잘 못해 후회하는 이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로 혹은 잘못된 선택으로 현재를 불만족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는 이들을 온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표면적이든 진심이든 이 감정이 생기는 자체를 우리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본인이 정한 각자의 틀에서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 틀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며, 누군가는 승진에서 떨어진 걸 기회로 삼거나, 회사 면접에 떨어진 걸 오히려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결국 사람은 각자가 정해놓은 그 틀 안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이 틀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굳어져 유연하게 바꾸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 삶의 틀을 누군가는 가치관 혹은 세계관이라고 표현한다. 본인이 한평생 만들어놓은 세계관을 인정받지못할 때 우린 변화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데 그땐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생각한다. 줏대 있는 가치관이라고 칭찬받는 시대는 이제 한참 지났으며 현대사회에선 이를 고집과 아집이라 부른다. 변화하는 이 시대에 맞춰 내 생각과 세계관은 물렁하다시피 계속 유연하게 바꿔줘야한다. 이를 행하지 않을 시 결국 문득 잘못 살아왔다는 한 가지 명징한 사실에 사로잡히고, 그땐 이미 아주 많은 것들을 되돌리기 힘든 상황에 처했을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한국 인구통계를 보면 중산층은 인구 5천만 중에서 30%가 채 안된다. 근데 현실을 보자. 대개 70% 이상의 사람들이 본인이 중산층이라고 믿으며 산다. 눈귀 닫고 그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그들의 세상에서만 사는 것이다. 만약 본인이 중산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두려워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왜? 한국에서는 돈이 없다는 건 '사회적 약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가령, 내가 연봉 1억인데 내 주변은 5천만 원이라고 하자. 그럼 아무 상관없다. 돈이 됐든 성취가 됐든 유무형의 무언가가 타인보다 우수하다면 인정욕구가 발휘되기 때문이다. 근데 내가 연봉 1억인데 내 주변사람들은2억이라고 해보자. 불행해진다. 인정대신 상대적 박탈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즉, 돈도 명예도 모두 ‘상대적으로’ 내 바운더리 즉, 틀 안에서 모두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생각해 보자. 가난한 자는 부자를 위해 투표한다. 공정한 부의 분배에 초점이 맞춰진 민주당은 상식대로라면 당연히 가난한 사람에게 표를 받아야 한다. 근데 정작 총선이나 대통령선거를 보면, 상식과 원칙 안에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지역적 색깔이나 본인이 오랫동안 고수하고 믿는 정당에 기계적으로 투표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그럼 부자에게 더 잘 살아라고 기득권을 주고, 투표를 행사하는 것인가? 본인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데? 그냥 그 부 자체에 대한 동경이다. 부와 명예를 가진 자, 그들이 이 현실을 바꿔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본인을 마음 맞는 방향대로 수동적으로 누군가 움직여주길 바란다. 본인의 의지대로 하면 성가시고, 조금이라도 그것이 잘못될 경우엔 본인이 다 책임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이건 각자의 틀에서 하나의 동경의 대상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한 가지 거스를 수 없는 사실에 사로잡힌다. 상식을 운운하면 반감만 산다. 그 상식이라 함은 각자의 틀과 경험에 맞춰 본인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각자에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엔 매사에 불편한 사람이 그토록 많은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하면 건강해진다'라는 아주 당연하고 상식적인 문장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는

"왜 운동만 해야 건강해진다고 생각하시죠? 운동 안 했는데 건강해지고 살도 뺐는데요?"

라고 하거나,

"운동했는데 몸이 아파요. 제가 상식을 부정하는 건가요?"

이런 말이 들린다. 거짓말 일 것 같으면 아무 커뮤니티에 가서 당연하고 불변의 진리인 상식적인 글 하나 써보면 된다. 그 안에서 순식간에 기상천외한 댓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대개 인기 유튜버들은 본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댓글도 안 읽는단다. 누군가에게는 결국 이 상식은, 검증된 상식일지라도 사실 정답이 아닌 것이다. 자, 그럼 어떤 게 정답인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그 틀 안에 상식이 들어오면 그게 본인에게 정답이 된다.


이 틀은 바꾸기 매우 힘들다. 사람은 관성이란 게 있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본인에게 아주 강하게 충격적인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절대 안 바뀐다. 그 계기는 비보일지 낭보일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기에 일부러 만들 수도 없는 노릇. 나대다가 인생 바로 골로 간다. 결국 바꿀 수 없다면 우리는 각자만의 틀을 넓히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면 선택지가 한없이 넓어진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내가 믿는 그 틀 안에서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게 이 고통뿐인 사회에서 시련과 고난을 겪을 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겨내고 다시 한걸음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선택이라, 말은 참 쉽다. 두 개가 있다면 A 아니면 B. 세 개가 있다면 A, B 아니면 C. 어떤 선택을 하느냐. 돈을 더 벌고 못 벌고, 좋은 직업을 얻고 못 얻고의 개념보다 우린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해나가면서 사느냐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된다. 앞선 예시로, 상식도 안 통하는 시대에 인생에 정답이 과연 어디 있을까. 정답은 없고 우리는 그저 주어진 각자의 환경에서 '본인에게' 더 나은 선택만 할 뿐이다. 당시에는 진짜 X 같고 후회 속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며 살아갈 수 있겠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그 선택이 전화위복이 되어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선택은 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르게 해석되는 법이다.

극단적으로 오늘 점심을 생선구이와, 짬뽕 중에 고민하다가 생선구이를 선택했다고 하자. 이건 실제로 내가 어제 겪은 예시다. (물론 난 짬뽕을 선택했지만). 생선구이를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 병원에 실려갈 수도 있지 않나. 근데 그렇게 되면 나는 무슨 죄가 있나? 정답이 짬뽕을 먹어야 한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냥 돌아보니 잘못된 선택을 한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옵션을 고르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지를 더 많이 가져가야 하고, 그 선택지를 많이 가져가는 것이 결국 나만의 틀을 넓히는 일이다. 그 틀은 자신감, 용기, 사랑, 이해 등으로 많은 단어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무언가로 본인을 표출할 때만이 그 틀이 넓혀진다. 혼자만 가지고 있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 그 틀의 깊이는 깊어지지 않고 넓이는 넓어지지 않는다. 행동이든 말이든 글이든, 그 어떤 걸로 아웃풋으로 내보내야만이 그 틀이 움직인다. 책 읽는 거 좋다고 백날 사람들이 말해봤자, 그걸 기록 하나 하지 않고 주야장천 책만 읽는다고 사람이 바뀔까? 절대 안 바뀐다. 일주일 전, 한 달 전 읽은 책 무슨 내용인지도 다 까먹는다. 메모를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거나 해야만 진짜 내 것이 된다. 주야장천 책만 읽는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책벌레라는 소리나 들을 것이다. 본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때만이 책이 효과가 있다. 즉, 내 언어로 내걸 표출해야 결국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언제 어디서 뭘 하고 싶은지 알고, 내 선택에 내가 순응하고, 그 선택을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더 나은 선택지를 내게 끌고 오기 위해 하루의 시작 새벽에 매일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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