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고백
'70전 1무 69패'
이 초라한 성적표는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게임스코어? 여자한테 차인 횟수?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는 내 인생이 걸린 일이다. 내 이름은 형규.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얘기다. 사지 멀쩡한 나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한국청년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스코어다. 그렇다. 나는 취업 삼수생에 나이는 서른 살이다.
집에서 부모님 밑에 기생 중이다. 30살 아직 직업도 없이 집에서 빈둥댄다고 욕하지 마시라. X나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뭐라도 하라고? 너무많은 자소서를 쓴다. 뭐라도 하는데 안 되는 거다. 하나다행인건 꽤나 긍정적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자기 객관화가 안된 것은 물론 아니다.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친구들이 하나 둘 취업할 때마다 나는 축하해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나이도 벌써 30살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빌붙어 희망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나. 내가 취업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 여자만 벌써 세명. 그들은 모두 떠났다. 그중 마지막 여자친구는 내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폭언을 했다. 그때 나는 느꼈다.
아, 지금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난 꼴에 지방국립대 경영학과 나와 눈은 높지만, 삼수인 현실을 깨닫고 집 앞에 있는 아무 데나 다 넣어보고 있는데 아무 데서도 연락이 안 온다. 소기업일수록 아예 열람자체도 하지 않는다. '미열람'만 2주째다. 그래,여기는 내가 손절한다. 하, 경영학과가 취업 잘 된대서 왔더니 경영은 개뿔, 회사 발도 못 디디게 생겼다.
사실 자기소개서 첨삭도 돈을 내고 몇 번이나 받았다. 1,000자에 2만 원 정도니, 3천 자에 6만 원 내고 받았는데 사실 큰 성과는 없다. 그들도 아마 공장처럼 찍어내 문법 몇 개 고쳐주고, 내게 물어본 경험 몇 개만 섞어 만드니 진정성이 떨어져 보일 수밖에. 그들도 대기업 현직잔데 퇴근 후 부업으로 쏠쏠히 얼마씩 챙기고 있는 자본주의에 찌든 사람에 불과하다. 진짜 내가 붙길 진정으로 바라는 영혼이 담긴 자소서는 아무리 서툴러도 어쨌거나 나만 쓸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나니 새벽 네시반. 벌써 5번째 자고 깨고를 반복한다. 왜? 오늘은 진짜 중요한 날이거든. 네시 반에 일어나 씻으러 화장실에 간다. 샤워기가 틀어져있고, 뜨거운 물 연기에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샤워를 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아 이번엔 붙을 수 있을까? 진짜 마지막인데'
앞이 캄캄하다. 긴장을 한 탓인지, 1분 자기소개 외운 게 더 버벅댄다. 하반기도 끝나, 이제 남은 기업은 딱 한 개. 이 면접에 떨어지면 또 일 년을 백수처럼 지내는거다. 그럼 왜 오늘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 오늘은 그 딱 한 개 남은 기업의 면접날이거든. 오늘 면접을 보는 곳은 서울이다. 부산에서 출발하려면 최소한 5시 반 KTX를 타야 한다. 그렇게 셔츠를 입으려는 찰나, 엄마가 말한다.
"니 면접이라고 세탁소에 셔츠 맡겨놨는데 큰일 났네"
엄마는 어제 셔츠를 찾아오는 걸 깜빡하신 거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참는다. 왜냐?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흰 셔츠는 내게 하나뿐인데. 도착하자마자 다이소에서 하나 급하게 사야겠다고 생각한다.엄마는 미안했는지, 역까지 태워다 주신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보고 와라잉~"
그래도 내 생각해 주는 건 역시 가족뿐이다. 아홉 시 반까지 도착인데, 8시에 겨우 서울에 도착했다. 내 옆자리 아저씨가 그래도 어린놈이 꼴에 구두 신고 있으니 면접 보냐고 물어보면서 팁을 전수해 주신다. 넥타이도 바로 맬 수 있게 부탁드렸더니 바로 옛날 생각나신다며 본인 목에 대고 매 주신다. 그리고는 불쌍하게 바라보면서 모르면 모른다 하고, 열심히 배우겠다고만 하란다. 아는 게 없어서 어차피 아는 척도 못합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내 겉모습조차 불쌍하게 보이나 보다. 하긴, 내가 나를 봐도 내 삶은 너무 불쌍하다.
서울역 1층 다이소에서 5천 원짜리 셔츠를 산다. 다이소 아주머니께 남자셔츠는 몇 번에 있냐고 물으니, 친절히 알려주신다. 오늘 면접을 보는 회사는 종합상사다. <복사+붙여 넣기> 달인이 되어 자기소개서를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곳에서 서류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다. 이런 대기업에 나 같은 지방대생이 서류합격을 하다니! 역시 많이 씨를 뿌려놔야 하나라도 걸리는 법이다. 그래도 꼴에 미국 1년 교환학생 갔다 왔다고 영어 듣기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아 다행이다.
으리으리한 건물 앞에 도착하자 벌써 기가 죽는다. 하, 일단은 재빨리 1층 화장실로 향한다. 이 목 늘어난 맨투맨은 벗고방금 산 셔츠로 빨리 갈아입어야 하거든. 자, 포장을 뜯어볼까?
그런데! 아 ㅅㅂ. 큰일 났다. 아무 생각 없이 다이소에서 샀는데 반팔셔츠다. 이런 중요한 날에 이런 중대한 실수를 하다니. 입장시간은 10분밖에 안 남았는데 다시 다이소에 사러 가긴 무리다.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냥 입어야지.
'그래, 정장 마이(재킷)만 안 벗으면 돼. 설마 면접관들이 마이 벗으라고 하겠어? 이 추운데?'
그러고는 반팔셔츠에 아까 아저씨가 묶어준 넥타이를 목에 두르고 그럴싸하게 목에 조여 맨다.
면접대기실에는 인사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목걸이를 매고 분주히 면접자 이름표를 정리 중이다. 맨날 서류탈락을 하더니, 이런 광경을 보는 것도 낯설어 신기하기만 하다.
또각, 또각, 또각.
정각이 가까워지자, 분주히 지원자들은 구두소리를 내며 입장한다. 얼굴을 스캔한다. 혼자 첫인상만 보고 누구를 이길 수 있는지 나 혼자 망상에 빠진다.
'쟤는 뭔가 삐리 해 보여, 패스. 오예 한 명 제쳤다'
'쟤는 머리스타일이 저게 뭐야? 양말도 이상한 색을 신고 왔네. 패스'
'쟤는 너무 어려 보여. 긴장도 엄청 한 듯? 패스'
자, 일단 3명 제쳤다. 왠지 나는 1차 면접에는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 반팔셔츠만 들키지 않는다면. 한 명은옆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다. 나는 확신한다. 진짜 진심으로 내가 혹여나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쟤는 이겼다고. 하하하.
그렇게 혼자 자위를 하다 안내자 안내멘트가 나온다. 기다리는데 긴장하지 말라고 강당에는 클래식 음악을 틀어준다. 이야. 역시 대기업은 달라도 달라. 혼자 대기업에 합격해 다니는 자랑스러운 아들, 자랑스러운 누군가의 남자친구가 된 나를 상상한다. 그리고 10초 뒤 꿈에서 깨고, 순번을 부여받고 대기를 한다.
나는 8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마인드컨트롤. 이것마저 떨어지면 또 1년을 백수로 지내야 한다. 통장에 이젠 돈도 없다. 그리고 8번이 불리고 나는 도살장의 돼지처럼 순순히 불려 간다.
'어? 직무인터뷰를 하는 줄 알았는데 웬 컴퓨터실이 있네?'
지원자별로 나누어 A조는 직무인터뷰, B조는 토론면접, C조는 영어면접부터 한단다. 나는 B조라 토론면접이다. 컴퓨터에 앉아 컴퓨터를 켜니,
<A국 진출할 수 있는 당사 전략방안을 제시하시오>
그리고 옆에는 A국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나와있다. 날씨는 어떻고, 인구는 몇 명이며, 위치는 어디고, 어떤산업이 발달해 있고, 현재 국가의 이슈나 상황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아. 내 전문분야 국가가 나왔다. 멕시코! 이미 미리 공부를 해왔던 터라 '예상한' 시뮬레이션대로 피피티를 만든다. 디자인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표 한 장 만들고, 위치를 강조하는 하이라이트, 그리고 이 회사 최신 뉴스 몇 개 겹쳐주면 끝이다. 어차피 30분밖에 없어그럴 시간도 없다. 30분이 지나고 회의실에 들어선다.
회의는 편한 분위기 속에서 하기 때문에 정장을 벗고 진행하는 게 좋을 것이라 한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왜? 나는 정장을 벗을 수 없어. 내 셔츠는 반팔셔츠니까. 이 한겨울에 반팔셔츠를 입고 오는 미친놈은 나밖에 없을 거야. 면접자들은 당황할 거고 난 무조건 떨어질 거야.
순간 아주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대답한다.
"아, 면접관님. 저는 혹시 입고 진행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와, 다행이다. 다행히 이유는 묻지 않는다. 이건 진짜 하늘이 도운 것이다. 그리고 내 차례가 돼 발표를 시작했다. 이 회사는 LNG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멕시코 옆 파나마운하를 통해 신규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아주 뻔한 개소리를 10분 동안 발표했다. 근데 왠지 그럴싸하다. 내 차례가 끝나고 토론을 이어갈 때는 절대 날카롭게 반박하거나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그럼 상대방을 수용하는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어디 면접 유튜브에서 대충 본 것 같다.
"아 그러십니까? 저도 00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동의 안 해도 그냥 무조건 동의한다고 하면 된다. 나는 쟤가 뭔 말하는지도 잘 이해 못 했다. 그렇게 40분간의토론면접이 끝났다. 와. 대기업 면접은 이렇게 힘든 거구나. 무슨 절차가 세 개나 있어.
1차 위기는 지난 듯하다.
-2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