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맞이해 써 본 철학을 통한 관계의 치유방법
데비: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커스틴의 어머니는 우리의 배우자보다 우리를 더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동의하시나요?
알랭: 그런 것 같네요. 결혼은 자신이 정말 아끼는 사람에게 딱히 친절을 베푸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데비: 그건 정말 심오한 말씀인데요. 조용히 훅 치고 들어오시는군요. 우리는 우리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반려자에게 더 못 할 짓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반려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말이죠.
알랭: 맞아요. 그래도 도망가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죠. 이런 것이 사랑의 아이러니예요. 사랑이 주는 안정감 덕분에 다른 이에게 숨기는 온갖 종류의 문제적인 모습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
-<멘탈의 거장들, 데비 밀먼> 중에서 인터뷰어 데비와 알랭드 보통과의 대화
우리는 우리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과 단 일분일초도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심장은 빨리 뛰고 목소리는 격양되며 미간은 찡그려진다. 이를 꽉 깨물고 발톱을 세우고 눈을 크게 뜬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 몸이 반응하는 모습들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 혹은 그 사람에게 보여준다. 가끔, 자주, 또 가끔, 또 자주.
매번 돌아서면 후회할 말들과 행동들의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다. 한치의 자비심도 없는 갈등의 쳇바퀴는 멈추기 전까지 끊임없이 돌아가며 나를, 상대방을, 우리 모두를 절망과 슬픔으로 몰아넣는다. 무수한 반복 속에서도 도저히 헤어 나올 뾰족한 묘수를 찾지 못하면 그 사실이 우리를 더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왜 내게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생각하며 세상과 온갖 신들을 향해 원망과 분노를 쏟아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모든 것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게워낸 다음에는 비로소 머리의 두통은 사라지고 호흡은 정상속도로 돌아온다. 심장은 천천히 뛰고 목소리는 가라앉으며 미간의 주름은 펴진다. 턱근육은 이완되고 발톱은 들어가고 눈에 힘은 풀린다. 나는 이제 자기 방어의 단단한 갑옷을 내려놓아도 된다.
가까울수록 소중히 여기고, 익숙할수록 정성을 다하라. - 조윤제*
관계가 쉽다면 왜 공자와 맹자가 그토록 관계에 대하여 수많은 가르침들을 남겼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화를 쉽게 내는 성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했다. 그만큼 관계는 매우 어려운 것이며 "자신을 휘감는 감정을 남에게 옮기지 않는*" 어른이 되는 일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중심에는 의지가 있다.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번을 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을 한다*. - <중용>
우리에게는 사유, 즉 생각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초능력)이 있다. 기쁜 설 연휴가 시작됨과 동시에 나와 함께 절망의 쳇바퀴를 벗어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세 가지를 떠올려보자.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종이와 연필이나 펜을 집어서 일단 써보자. 그러면 마법같이 생각이 더 잘 떠오른다.)
예 1) 편지/카드 쓰기: 진심을 담아 짧게라도 손 편지를 써본다. 나도 모르는 사이 글을 쓰는 행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나의 진심과 마주하게 되고 상대방에게 그 진심을 조금이라도 더 잘 전할 수 있도록 나는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우러난다 (우러나면 더 좋다).
다만 최대한 물질적인 것들의 도움 없이 오로지 편지에 마음을 담아 전하도록 노력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표현되어야 가장 잘 전달되는데 언어만큼 섬세하고 명확하게 마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문장력이 걱정되거나 막상 쓰고 나서 편지를 전달할 용기가 나지 않으면 작은 선물 (꽃이나 초콜릿, 혹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작은 간식이나 책 등등)에 편지를 살짝 끼워서 주는 것은 찬성한다. 하지만 편지를 쓰는 동안, 즉 글을 쓰는 동안 자기 성찰을 자동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덤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짧더라도 손 편지를 써보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내가 직접 해봐서 그 효력을 알기 때문에 강력히 추천한다.)
예 2) 설 연휴를 맞아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에 초점을 맞춰보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번에도 돈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위에서는 편지로 진심을 전했다면 이번에는 말로써 진심을 전하는 차례다. "여보(혹은 당신), 그 많은 음식 준비하느라 참 고생 많았어요. 매번 참 고마워요." "여보, 오랫동안 운전하느라 눈도 아프고 긴장해서 몸도 피곤하겠어요. 항상 고마워요." "여보, 가족들 모두 챙기느라 여러모로 신경 쓰고 고생이 많아요. 당신이 있어서 내가 참 든든하고 고마워요." 여기서 포인트는 단순히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심이 상대방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고생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주고 감사히 여긴다는 그 마음이 전달될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은 꼭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실천할 수 있는 행동들로는 집안일 도와주기 (설거지와 청소, 쓰레기 버리기), 안마해 주기,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료 가져다주기, 손 잡아주기, 안아주기 (용기를 내서) 등등이 있다. 혹시라도 정 해야 할 일을 못 찾겠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도 있다. "여보, 당신 고생이 참 많은 거 내가 다 알아요.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면 내가 해보도록 할게요." 다시 말하지만 말이든 행동이든 자신의 진심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만 위의 예처럼 최대한 물질적인 것들에 의존하지 말고 시도해 보자. 물질적인 것도 좋지만 일단 진심이라는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 3) 나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본다 - 평소 나의 말투와 행동들을 떠올려본다. 혹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투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봐야 한다. 예를 들면 몸이 피곤하거나 머릿속을 꽉 채운 근심 때문에 상대방에게 쉽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는가? 떠오르는 나의 말들과 행동들을 적어보고 잠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자기 성찰이라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말과 행동을 했을 때의 나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쓸 수 있겠다. "나는 음식을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느라 몸이 매우 피곤했는데 상대방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 상대방에게 서운했다." "나는 하루 종일 일하면서 직장에서 눈치 보고 스트레스를 받고 왔는데 집에 와서까지도 눈치를 봐야 하는 것 같아 상대방에게 서운했다."
우리는 모두 내가 어떤 "희생과 노력"을 한 뒤에는 사랑하는 이에게 그 "희생과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 욕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혹은 전혀 충족되지 않으면 내가 "예상하고 바랐던" 상황이 전개되지 않음에 대해 감정적이 된다.
우리가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포기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렇게 분노할 일은 없어질 것이다.** - 세네카
감정이 격해져서 무조건 상대방만 탓하고 서운해하기만 하면 우리는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절망의 쳇바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의 목소리를 듣고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생각의 힘이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주인공 네오에게 두 개의 알약을 건네며 고르라고 하듯이 우리에게는 항상 생각을 고를 수 있는 결정권이 있다. 어떤 알약을 고르는지에 따라 우리는 결코 쉽지 않은 거친 진실의 세계를 마주해서 변화하거나 매우 매혹적이고 안락한 거짓의 세계 속에 계속해서 살아가게 된다. 나는 우리 모두 용기를 내면 빨간 알약을 고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우리는 절망의 쳇바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절망과 슬픔에 빠져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
세네카는 우리가 흔히 '조롱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상대방(혹은 무생물들-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 "당연히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리고(and)"로 연결되는 절이 들어 있는 문장을 버리고 "... 하기 위하여 (in order to)"로 연결되는 절이 든 문장을 취하고 싶어 진다.**"라고 말했다. 위의 예들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혹시라도 나는 상대방이 일부러 내가 몸이 피곤한 것을 알면서도 나를 괴롭히기 위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혹은 상대방이 일부러 내가 직장에서 눈치를 보고 온 것을 알면서도 나를 괴롭히기 위해 나에게 눈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다시 그 생각을 이렇게 바꾸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일단 스스로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집안일을 많이 해서 몸이 많이 피곤하고 지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혹은 "나는 직장에서 일이 힘들고 눈치를 많이 보고 와서 몸이 긴장했고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져 있다." 그다음에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런 내 마음상태를 모를 수 도 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를 때가 있듯이). 그러므로 나는 상대방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상태를 말로 표현해서 알려주어야 한다." 위의 모든 예들이 그러하듯 관계의 기본의 기본은 바로 대화이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스캔해서 볼 수 없다. 오로지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만 나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고 또 상대방의 마음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솔직히 돌아보는 일, 즉 자기 성찰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세상을 구하는 일의 첫걸음이다. 세상을 구한다는 표현이 다소 거창하게 들를지 몰라도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먼저 변화해야 하고 내가 나를 아는 것이 바로 그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또 나아가 만물을 사랑하며 이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일이다.
사랑은 돈도 되지 않고 직장도 찾아주지 못하고 주식도 사주지 못하고 휴가도 보내주지 않는다. 현재 내가 가진 문제들의 반의 반의 반도 제대로 말끔히 해결해 주지 못한다.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과 위인들이 그토록 간절히 사랑을 노래한 데에는 사랑 안에는 분명 위대한 힘과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단지 아직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했을 뿐.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 빅터 프랭클
매 순간 죽음과 죽음옆에서 죽음과 함께 아우슈비츠 삶을 견뎌낸 빅터 프랭클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매일같이 마주하며 이 진리를 깨달았고 우리들에게 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투쟁하여 얻어낸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진리를 전하고 있다.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글귀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의 사명을 다시 선명히 깨닫는다.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금방 잊힐지도 모르고 아주 미미해 보일지 모르는 나의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되어 줄 수 있음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나는 오늘 어떤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갈 것인가 진지하게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바로 이 고민이 우리들의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다산의 마지막 질문, 조윤제>
**<철학의 위안, 알랭드 보통>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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