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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30. 2023

세컨드 다음 써드 윈드

세컨드 다음 써드 윈드


흑-윽! 둔탁한 충격 뒤 남은 예리한 통증에 손끝이 떨린다. 쉽게 멈추지 않는 엄지손가락 피를 보며 순간 겁을 먹어 휴지로 감싼다. 지혈하기 위함인지, 일단 덮어 가리려는 반사 행동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직장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한 시간의 점심시간, 짧기만한 소중한 시간이기에 자처하여 ‘퀵’을 받으려던 것뿐이다. 퀵 기사가 바닥에 내리꽂듯 신경질적으로 쌓은 커다란 상자 사이에 낀 내 엄지손가락은 이물감도 못 느낄 만큼 하찮은 거였다. 큰 소리도 못 지르고 손가락을 급히 빼냈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의 임무를 다한 그는 이미 등을 보이며 떠났고 찌르르한 고통이 느껴지는 왼손 엄지손톱은 눈이 마주친 1초 만에 뿌리 부분부터 검붉게 변해 버린다. 


평소라면 평온할 오후 1시,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를 검색하니 다행히 ‘13:30-14:30 휴게시간’ 볼드체로 안내되어 있다. 엄지를 감싼 손수건을 꽉 움켜쥐곤 경보하듯 향한다. 이번 주 낮 기온이 20도까지 오른다더니 정말 바깥은 나만 몰랐던 봄이 와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여전히 벗지 못한 사무실에서 입던 후리스를 그대로 입고 나온 걸 후회한다. 700m 떨어진 건물 2층에 있는 정형외과 접수처에 다가가자 “예약하셨어요? 진료 접수는 2시 30분부터 가능하세요.” “점심시간이 1시 30분부터 아닌가요? 20분인데요? ” “지금 접수는 안되시고 오후 진료 접수는 2시 30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제가 다쳤는데,,, 그럼 한 시간 후에 다시 와야 하는데요…” 억울함에 다급히 한 마디를 얹지만 받아들여질 리 없단 걸 안다. 상처 부위도, 다친 정도도 관심 없는 직원은 정면의 나로부터 시선뿐 아니라 몸마저 돌린다. 환대까진 아니어도 존재를 거부당한 자리에서 버텨 서있지 못하는 나다. 후리스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몸 안 열기가 땀방울이 되어 등을 타고 흐른다. 손수건으로 감싼 아픈 엄지손가락을 조심하며 겉옷을 힘겹게 벗는다. 지나왔던 길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갈 뿐인데 방금 전 보지 못한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벚꽃나무를 포함하여 매화나무 살구나무,,, 가로수는 가지마다 꽃잎들을 피처럼 터뜨리고 있다. 식후 저마다 손에 든 아이스커피 대신 난 다친 왼손을 조심히 세우고 약국으로 들어가 소독약과 대일밴드를 구매한다.


유독 찐득한 월요일의 피로감을 떨쳐내려 점심시간 바로 옆 안양천 둑길을 산책할까 했던 3월의 마지막주였다. 때이른 벚꽃길이지만 얼마나 피었나 사전답사나 갈 걸 괜한 오지랖에 손가락만 고생이다. 결국 2시 30분에도 난 아까의 정형외과 접수데스크를 재방문 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 엄지손가락에 단단히 밴딩을 하고 어색하게 키보드 스페이스키와 휴대폰 화면을 누르고 있다. 현대인의 엄지손가락은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으며. 치료는 일단 퇴근 후로 보류하고 지인들이 모여있는 단톡창에 다친 손톱의 상태를 물으려 사진을 전송한다. “예측 불가 부상에도 네이버 예약은 필수였어.” 실없는 농담에 친구로부터 뼈 있는 한마디가 도착한다. ‘인내의 아이콘!’ 그 한 줄을 한참 멍하니 바라만 본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진 않지만 절대 인내심이 강한 편은 아니다. 그보단 자신의 ‘끓는점’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다는 표현이 맞다. 나를 잃지 않고 평온할 수 있는 통증, 아픔, 무기력, 분노, 피로에 대한 한계점을 파악하고 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서 단편 <난주의 바다 앞에서>를 읽다 잊어버릴까 핸드폰으로 페이지를 찍어 둔다. 소름 돋을 만큼 공감한 문장은 ‘세컨드 윈드’가 설명된 부분이었다. ‘이거 맞아 맞아, 내가 알지!’ 출발점에서 8km 달리기를 설정하고 가장 힘든 구간은 2-3km라는 걸 매주 한 번씩 경험하고 있으니까. 그 고비만 넘기면 땅을 박차는 양 발의 템포도 거칠고 불안했던 호흡도 어느새 리듬을 탄다. 남들이 보기엔 미련한 인내의 아이콘인 나는 사실, 사점(dead point)이 지나 세컨드 윈드의 상태를 즐기는 사람일지 모른다. ‘겁먹지 마, 그냥 해버릴 수 있는 나야.’ 손톱이 빠질까 걱정했던 엄지손가락은 이틀 만에 키보드를 치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다. 아, 맥주캔 따기는 엄지손가락의 집약된 힘이 필요한 동작이라 아직 힘겹지만. 손톱 뿌리에 반원 모양으로 남아있는 새까만 멍을 보며 다짐할 뿐이다. 내 안 온도계를 체크하며 끓어넘치지 않게 조심조심 나를 잘 돌보라고! 그거면 충분하다.


April 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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