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글 김경진 에세이시
분수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요. 단순하게 답을 한다면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불행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위대해지고 싶은 사람도, 평범함을 무기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삶의 목적은 행복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고독한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을 운명으로 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악하다거나 착하기로 이미 결정지어진 채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다만 살아가다 보니 자의적으로 또는 타의에 의해서 그렇게 처지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지가 문제가 됩니다. 행복이라는 주머니는 염치가 없습니다. 이 정도면 행복하지 않겠는가 하다가 크기를 불려 가게 됩니다. 바람을 넣으면 부풀어 몸집을 불리는 풍선과도 같습니다. 만족의 정도가 크기를 점점 늘려갑니다. 만족이 클수록 더 행복하다는 착오에 빠져들게 됩니다. 공기를 품을수록 팽팽해지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풍선이 터지듯 분수를 모르는 행복은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분수는 욕심을 자제하라는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고플 때 배가 살짝 부르다고 느낄 만큼만. 기분이 처질 때 가볍게 기분을 끌어올려주는 맥주 몇 잔만큼만. 외로울 때 시끄럽지 않게 떠들 수 있는 수다 몇 마디만큼만. 분수는 소주잔을 채우듯 채우고 싶은 정도의 칠부능선이면 될듯합니다. 모자라면 아쉬움이 크게 남아 만족에 이르지 못하고 넘치면 잉여를 버려야 합니다.
지금의 나는 행복합니다. 부족은 느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아 버릴 만큼도 없습니다. 시간이 나면 가볍게 멀지 않은 곳에 삶의 여정을 새기듯 여행을 합니다.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사람과 새로 맞아들여 식구가 된 강아지가 언제든 나를 반겨줍니다. 가끔 만나 서로의 안부를 부담스럽지 않게 나누는 지인들도 새로 생겼습니다. 관계의 분수, 사랑의 분수, 시간의 분수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만족의 정도가 행복이라면 행복의 정도를 지켜가는 것이 분수임을 다시 새겨 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