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냠냠

새글 에세이

by 새글

빗소리 냠냠


빗소리가 맛있게 들린다. 오월 초의 비가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어젯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비가 오전 중에 멈출 듯하더니 오후까지 내리고 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진다. 작년 마른장마 이후로 비다운 비가 없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기대를 할수록 오는 것인지 약을 올리는 것인지 물기만 내비치다 말곤 했다. 댐이 바닥을 드러내고 농부님들은 스프링클러를 돌리며 하늘 탓, 나라님 탓을 해야 했다. 자연의 재앙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창문을 강하게 때리며 비가 온다. 고마운 비다. 반가운 비다.


창문을 옆으로 밀고 손을 내밀어 빗소리를 잡는다. 손바닥이 젖을수록 물비린내가 향기롭다. 빗소리가 내는 맛난 맛을 맞보고 싶어 진다. 플라타너스 너른 잎이 조금 더 넓어졌나 보다. 버드나무 잎들이 많이 풍성해지고 있다. 포플러나무도 푸른빛을 짙게 발산한다. 빗소리가 선사한 맛에 나무들이 제대로 입맛이 들었다. 손을 적신 물맛을 본다. 싱그럽다. 밋밋하지만 오묘한 멋을 품고 있다. 빗소리 냠냠, 맛나다.

비맛은 물맛이다. 평범하지만 부족하면 비범한 맛으로 느껴진다. 내 삶의 시간들도 마찬가지다. 소중하게 대우해 줬는가 물어본다. 어느 땐 흔한 물맛처럼 여겼고 어쩔 땐 귀한 술맛처럼 아꼈다. 지금은 일관되지 않게 삶을 대했음을 반성한다. 지금이라도 나를 일관된 귀함으로 존중해 줘야겠다. 어쨌든 나의 지금을 만든 이는 오롯이 나다. 잘되었든 그렇지 않든 나는 나의 책임이다. 남 탓을 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나의 현재를 이유로 남에게 고마워할 이유도 없다.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주체는 나의 의지고 탓을 받아야 한다면 나의 무능이다. 많은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 연륜이 쌓이는 이유는 자신의 공과를 잘 벋아들이기 때문이다. 잘못을 거부하고 받아들임을 망설이지 않아야 자신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잘함이 있다면 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자신에게 드러내 줄줄 알아야 한다. 연륜이란 이런 받아들임과 드러냄에 인색하지 않은 것이다.


기름을 적당히 두른 팬에 파가 반, 잘게 썬 오징어가 반에 반인 전을 지져내서 시큼 달달한 막걸리 한 사발을 빗소리에 섞어 마시고 싶다. 쉰 김치를 깍두기처럼 썬 돼지고기 뒷다리살과 함께 냄비에 때려 넣고 펄펄 끓여낸 김치찌개에 도수가 물처럼 희석 돼버렸을자라도 잔수를 채우면 얼굴이 벌게지는 소주를 맞이하고 싶다. 비가 오는 날에는 느슨해져도 좋다. 생의 모든 시간을 긴장한 채로 산다면 불행을 덮고 사는 것과 같다. 빗소리가 나를 게으름에 빠져들게 해 준다. 미워하던 것들도 용서해줘버리고 싶다. 부둥켜안고 있던 미련들도 놓아주고 싶다. 아래서 나는 비님이 오시는 날이 행복하다. 잘 먹고, 잘 웃고, 잘 울기도 하면서 부끄럼 없이 살아가자.


인생은 마음을 먹은 때부터가 시작이다. 마음을 다잡지 않는 것이 늦게 할 뿐이다. 출발을 감행할 마음이 있다면 늦을 일이 없다. 시작하지 않는 것이 늦음이다. 빗물이 고여 웅덩이를 이루다 또다시 흘러간다. 물이 몸집을 불리기 시작하면 잠시 멈추긴 하겠지만 물줄기들의 합이 물길을 내고 강과 바다로 끝내 가고야 만다. 수량이 많아지는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어있다. 제법 긴 시간을 기약하는 듯하다. 가끔 하늘을 가를 듯 번개가 치기도 한다. 천둥소리마저 듣기 좋다. 오늘밤에도 빗소리와 같이 잠을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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