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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Oct 07. 2024

신축 빌라 곰팡이와의 전쟁

집 없는 세입자의 설움



# 부동산 이상형 월드컵의 결과


가계약금까지 걸었던 빌라 매수는 취소됐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둘째의 출산 예정일은 가까워지고 언덕 위 빌라를 오가기에는 점점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원점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리가 왜 이사하려고 하는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집의 요소가 무엇인지, 집을 정할 때 각자 포기하지 못하는 조건은 어떤 건지, 커다란 스케치북에 쭉 써 내려갔다. 말하자면 부동산 이상형 월드컵을 한 셈이다. 결국 우리 부부는 평지에 있으면서 방 3개에 주차 스트레스가 없는 깔끔한 집을 원한다고 결론 내렸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매매는 부담스러워 마음을 비우고 전세 매물을 찾았다. 우리가 정한 조건에 맞는 매물은 신축빌라 전세였다. 입주는 아니었고 기존에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직장 문제로 이사를 원한다고 했다. 평지에 같은 빌라 브랜드 여러 동이 같이 모여있어서 나름의 빌라 단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 놀이터와 유치원에서 가깝고 시장도 오갈 있었다. 낮에 동네 골목을 걸어보니 새소리까지 들릴만큼 조용했다. 구축보다 신축이라 겹주차 없이 100% 주차가 가능했고 엘리베이터까지 있어서 편리함으로는 훨씬 업그레이드가 됐다.


다만 방이 3개인 치고는 그리 크지 않았다. 2개로 해도 될 집3개로 쪼개놓은 구조. 하지만 깔끔하고 밝았다. 출산 전에 첫째를 근처 어린이집에 입소시켜서 적응하는 기간까지 생각하면 이제는 이사를 진행시켜야 했다.


문제는 처음 그 집을 볼 때 창가 밑으로 약간 희미한 얼룩이 있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전세 계약서에 해당 문제로 문제 발생 시 임대인이 적극 수리한다는 특약 조건까지 넣었다. 혹시나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이 계약서를 보여주며 처리해도 되니 든든했다. 그런데 슬프게도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 슬프게도 왜 곰팡이에 대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가


4월에 이사를 마치고 6월에 출산을 한 뒤 별일 없이 전셋집에 적응해 잘 지내고 있었다. 집이 넓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이들을 케어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신랑도 야근을 하고 늦게 오거나 아침 일찍 나가야 할 때도 주차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없으니 너무 편하다고 행복해했다. 문제는 그 해 겨울에 발생했다.


집에서 가장 통풍이 잘 되고 햇볕이 잘 드는 안방 창가 쪽 벽지에 어느 날부턴가 얼룩이 보였다. 아이들이 있어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환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곰팡이 같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안방 창 너머는 바로 외벽이라 겨울철 온도차 때문에 발생하는 결로 문제 때문일 것 같았다. 결로와 곰팡이는 절대 안 된다 생각하며 그렇게 거르고 걸렀는데 곰팡이라니!!!


임시방편으로 침대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통풍이 되도록 거리를 두게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방법을 실행해 락스물로도 닦아내 보았다. 하지만 벽 위쪽 모서리에서부터 거뭇거뭇한 것들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아래쪽에 곰팡이들이 육안으로도 보일만큼 드러났다.


하필 아이들과 함께 자야 하는 안방에서 곰팡이 문제가 생겼다. 신랑은 비염이 심하고 막내는 생후 5개월쯤 됐을 때라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곰팡이 벽을 보며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그냥 이사오지 말걸, 거기서 좀 버티고 살걸, 내가 또 문제를 만들었구나' 자책하게 됐다. 방 3개지만 1개는 옷방, 1개는 잡동사니방, 그나마 가장 큰 안방에서 4 식구가 자고 놀았는데 그 방을 못 쓴다니 거실에서 반강제로 원룸살이를 해야 할 판이었다.




# 이래서 한번 고쳐주면 끝이 없다니까


일단 집주인에게 사진을 보내며 상황 설명을 했다. 사진을 확인한 주인은 보통 외부 선을 벽으로 뚫는데 외벽이라 곰팡이가 많이 생기는 경우일 거라고 했다. 이건 환기 여부 보단 애초부터 빌라를 잘못 지은 문제라며 조치를 취해주겠다고 했다. 혹시나 우리 때문이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큰 동요 없이 해결되는 듯 보여 안심이 됐다.


그런데 덧붙여 그 공사를 하는 기간 동안 며칠이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모른다고 했다. 그럼 그동안 우리 식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리다고 했더니 그건 본인이 해줄 게 없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양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숙박비를 내고 다른 곳에 묵을 형편도 아니고 그런 비용을 지원하는 것도 아니라 난감했다. 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갑자기 집주인은 자기가 수리 안 해준다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별안간 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 집주인이 덧붙인 말이 내 심장을 콱 찔렀다.


"아니 저번에 화장실 세면대 막혔다고 해서 내가 그것도 고쳐줬잖아. 난 다른 집 살면서 전구 하나 다 내 손으로 갈았어. 계약할 때 말고는 집주인한테 연락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참나, 이래서 한번 고쳐주면 끝이 없다니까."


그 마지막 말에서 열불이 났다. 정말 화딱지가 나서 전화기에 대고 욕을 하고 싶었다. 화장실 세면대는 이사 오는 당일날 이삿짐센터 아줌마 아저씨들이 먼저 발견했고 이건 우리가 입주하기 전에 물이 안 내려가는 상태인 것이니 빨리 집주인에게 말해야 한다고 알려줘서 연락했던 거다.


당연히 내가 입주해서 살다가 물이 안 내려가는 거면 내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들어가서 막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사 당일 집이 그 상태인데 그것도 세입자가 돈을 내야 하나? 그런 상태의 집에 대해 아무런 책임 없이 그냥 전세금만 날름 받고 임대를 줄 수 있나? 임대인이라면 정상적인 상태의 집을 임대하는 게 당연한 건데 왜 내가 갑자기 모든 걸 수시로 고쳐달라고 징징댄 별난 세입자가 된 거지? 


곰팡이와 결로를 피하기 위해 애들을 안전하게 키우려고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고르고 골랐는데, 구축도 아닌 신축이라 깨끗할 거라 믿었던 건데, 심지어 혹시 몰라 계약서에 특약도 써뒀는데 이런 결과라는 게 정말 짜증 났다. 곰팡이 나는 집에서 어린 딸들이 숨 쉬고 있는 것도 싫고 이 한겨울에 어딜 가야 하나 막막한 지금 상황도 혼란스러웠다. 나를 진상 세입자로 몰아가며 소리를 질러대는 집주인과의 통화에 말문이 막혔다. 정말 억울하고 서러워서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단 신랑과 상의한다고 전화를 끊었다.



# 집 없는 설움


신축 빌라에서 곰팡이 사건을 겪으며 집 없는 설움, 세입자의 비애를 고스란히 느꼈다. 그전 전셋집에서는 문고리가 고장 나서 문이 안 열려 방에도 갇혀보고, 썩어가는 화장실 수납장은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어 자비를 들여 새것으로 교체했다. 창문 밑으로 비가 오면 물이 차서 벽지가 부풀어 오를 때도 구축이니 어쩔 수 없다 여기고 사진만 찍어 집주인에게 보고만 했다. 오래된 집이라 연식이 있으니 문제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싶었는데 신축 빌라에서 곰팡이를 보고 나니 머리를 한대 띵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임대인의 입장에서는 계약날만 보고 다른 연락이 없길 바라겠지만, 그건 세입자인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여력이 아닌 집 자체의 문제니까 난 임대를 준 집주인에게 보고하고 수리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 다만 늘 예의를 지켜 요청하고자 노력했다. 어쨌든 집이 없어서 빌려 사는 입장이니 아쉬운 소리를 하는 편이 됐다. 그간 내가 너무 호구처럼 좋게 좋게만 했던 건가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집주인의 한마디로 별안간 진상 세입자 취급을 받아보니 집 없는 설움이 극에 달했다. 나쁜 집주인 덕분에 집을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떤 면에선 좋은 집주인의 역할을 해줬다고 본다. 더럽고 치사해서 내 집을 빨리 마련해야겠다는 맘을 더 강하게 먹은 계기였다.




곰팡이가 생긴 이유가 꼭 환기 때문은 아니다


보통 세입자들이 집주인에게 곰팡이 얘기를 꺼내면 집 환기를 안 시켜서 생긴 거라고 핀잔을 듣는다. 하지만 이 곰팡이 신축 빌라를 살다가 이사 간 다음집인 아파트에 살면서 느꼈다. 환기를 안 시키면 곰팡이가 생길 확률이 높겠지만 그렇다고 곰팡이가 생긴 이유가 꼭 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왜냐하면 그 아파트에 살면서 이 빌라에 살 때보다 환기를 훨씬 덜했음에도 곰팡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전에 6년간 살던 집주인도 그리고 우리가 4년 사는 동안에도 말이다. 곰팡이가 안 생기는 집은 환기에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


이 신축 빌라처럼 단열 공사가 제대로 안되면 실내외 온도차가 커져 결로가 생기고 그게 곰팡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사실 아무리 환기를 해도 소용이 없다. 나 역시 곰팡이가 생기기 전에도 계속 환기를 시켰고 곰팡이를 발견한 후에는 더 자주, 오래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오들오들 떨며 열심히 환기를 했는데 그게 모두 헛수고였다. 건물 공사 또는 빌라 자체의 문제이니 아무리 환기를 해줘도 다시 곰팡이가 생길 확률이 높다.


결국 나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이 집에서 집주인의 진상 세입자 취급을 참아가며 어떻게든 공사를 하고 계약 기간을 채우며 살던지, 아니면 손해를 감수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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