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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릭Langlic Aug 01. 2023

중간관리자의 말할 수 없는 비밀

'어쩌다 팀장'이 된 당신에게 들려주는 오피스릴러 - 3편

오늘 저는 계약직 팀원에게 정규직 전환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OST 중에는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참아온 감정을 뒤에 놓았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할 때의 마음을 잘 설명하는 문구가 아닐까 합니다. 위아래에서 파도가 몰아칠 때 저 자신의 감정은 그보다 뒤로 하고 생각하는 일. 위와 아래 사이를 원활히 돌아가게 하기 위해, 혹은 양쪽이 제 역할을 하도록 시시비비를 가리고 상황에 알맞은 모습으로 보이는 일. 억지로 연기하는 건 아닙니다만, 책꽂이 사이의 당장 안 읽을 책처럼 저 자신의 마음을 끼워 넣어두는 지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랫사람에게 회사가 하지 않거나 미처 못 하는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팀원은 실제로 괜찮은 친구입니다. 업무능력이 세심하고 우수하며, 인성도 예의 바르고 선량합니다. 팀원들과의 관계 또한 좋고, 제가 나무랄 일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매력도 있기에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신입으로라도 키우고 싶은 직장동료입니다. 그렇지만 전환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회사가 공식적인 답을 안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사의 올해 돌아가는 사정과 TO를 보면 높은 확률로 어려울 거고, 회사가 계약 만료 직전에나 통보하던 경우가 많은 걸 압니다. 이에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적절한 시점에 미리 가장 예상가능한 미래와, 가장 현실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팀원이 고민하고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회사가 못/안 하는 도리를 하는 일입니다.


괜찮은 친구기 때문에 싫은 소리를 하기 어렵고, 떠나보내는 마음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을 다스리고 취미로 속을 가라앉히며 팀원의 마음을 헤아려 위로의 말을 합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아니면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관리자가 '어쩔 수 없지. 다 그런 거야.'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어떤 분은 밥이나 술을 먹자고 하거나 서로 힘드니 이해해 달라고 좋게 설명합니다. 쿨하거나 다정하게 들리시는지요? 아니요, 다 개소리입니다. 그건 나 좋은 상사라는 자기 위안입니다. 아무리 좋은 상사였어도 생계를 끊는 건데 듣는 직원 마음이 완전히 좋을 수는 없습니다. 더 윗사람이 결정했더라도 인사권자인 이상 원망받을 의무가 있습니다.

계약직이 일반적으로 약자기 때문에 혹자는 언더도그마냐고 할 수 있지만 고용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계약은 확실해야 합니다. 단, 냉정하기보다 냉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팀원에게 저는 유사시를 위해 이력서부터 작성하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언제든지 돕겠다고 했습니다. 회사 내부의 어필 외에 이력서 검토, 타사 TO 탐색, 레퍼런스 체크 등을 포함해서요. 그게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고, 진심을 주었기에 원망받으면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구성원에게 최선의 방향을 제시하고,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 보직수당을 받는 이유입니다. 물론 일을 못하거나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아랫사람에겐 또 다른 피드백을 이야기하는 일을 포함해서요.

우스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저도 인턴 하다가 잘려 봤습니다. 사회초년생 기준 험한 일도 당했었지요. 상처받았냐 하면 당시엔 받았고, 지금은 별 상관없습니다. 저에게는 좋지 않은, 그러나 유용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팀에 들어온 인턴에게 첫 사회생활의 기억을 긍정적이고 알차게 남겨주려고 노력하게 되었으니까요. 정말 그랬는지는 그 친구에게 저 없는 자리에서 물어야 하지만, 최소한 괜찮은 인턴십을 하고 갔습니다. 대물림하지 않는 시집살이 같은 것에 가까울지도요. 제가 헤아려야 하는 사람을 위해, 약자일 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지금도 돈과 권력이 없으니 강자는 아닌 데다, 약자고 강자고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윗사람의 눈과 입, 시선과 말을 조율하는 일입니다.

중간관리자의 위에는 보통 준임원 혹은 임원이 자리하고, 권력과 정치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많습니다. 그들을 중간관리자의 입장에서 보다 보면 온갖 인류애가 부서지는 체험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인생의 멘토가 될 수 있는 좋은 경영진도 존재합니다. 농담으로, 이런 임원을 만났다면 당신은 인생의 행운을 조금 사용했다고 봐도 됩니다. 하지만 일단 좋고 나쁜 상사를 떠나 중간관리자의 역할에만 집중해서 저의 경험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먼저, 시선에 대한 영점조정을 합니다. 윗사람이 될수록 판단해야 하는 범위가 넓고 건수가 많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 전체적인 흐름이나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에 대해서는 실무보다 잘 아는 베테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부 프로젝트에 대한 통제는 중간관리자가 하고, 임원은 주로 보고를 받는 입장입니다. 그 말은 중간관리자의 보고서로 많은 것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실무를 잘 모르는 상사일 경우, 보고서의 단어 하나에 한쪽으로 치우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이건 별로'라고 보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임원은 '이거는 무조건 별로'라고 마음속으로 결론지어 잘못된 쪽으로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가 날 수도 있습니다.

팀장은 실제로 결과가 맞고 틀리는 것과 별개로, 실무의 판단을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여 손익과 현황을 포함하여 전달해야 합니다. 요약하자면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근거를 조립해 주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정확한 단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처음부터 기울어진 의견을 갖고 있거나, 특정 사실에 강한 주장을 가진 임원, 혹은 기분파인 임원, 나아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임원들 등도 있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듯 최종 목적지가 같아도 그들에게 어떤 단어와 과정을 보여줘야 정확하게 의도한 결론으로 유도할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비게이션 경로 탐색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상사의 말을 필터링해서 내립니다. 특정 와인을 마실 때 디캔터라는 것을 사용하는데, 마시기 전 와인의 향미를 더하거나 불순물을 거르는 데 사용합니다. 그처럼 임원진의 지시나 말을 어디까지 팀원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를 결정하는데,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지시하였는데 팀장이 불평하며 이렇게까지 일을 시킨다고 말하면 팀원은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종종 임원이 팀장 본인에게 상처를 줄 때 그걸 그대로 팀원들에게 속없이 전하면 이간질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저연차에 흡수할 수 있는 잘못된 사회생활의 자세로 이어질 수 있어, 팀장 본인이 상처받더라도 어느 정도 거르거나 내리지 않기도 합니다. 따라서 임원진의 말을 잘 필터하고 핵심 의미를 추출하여 적합한 방식으로 조직원에게 전달하여 '일이 되게' 하기 위해 고민하게 됩니다.


제가 만난 많은 팀장님들은 이 같은 일로 새우등 신세라고 한탄하면서도 본인 역할을 잘 하기 위해 고민하셨습니다.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많은 변수와 위기가 무한하니까요. 그 사이에서 좋은 리더가 되는 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출근길에 오르는 모든 팀장님들에게 응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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