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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릭Langlic
Oct 03. 2023
지루함에 대한 욕망의 수기
'어쩌다 팀장'이 된 당신에게 들려주는 오피스릴러 - 5편
Then tell me, Maria Why I see her dancing there
그렇다면 말씀해 주소서 마리아여, 어째서 그녀가 춤추는 모습이 보이는지
- '노트르담의 꼽추' 중 <Hellfire>
연휴의 끝자락에서 출근을 앞두고 태블릿 앞에 앉았습니다. 여느 때와 비슷한 연휴였지만 매년 나이가 들수록 몸과 마음의 초침이 빠르게 움직인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아마 많이들 그러시겠지만 연휴가 길면 게으르고 싶어 하는 몸과 무엇이든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 야무지게 쉬지도 못한 상태로 마지막 날을 맞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강박일까요? 사실 며칠 게으르다고 사는 데 문제도 없고 오히려 잘 쉬는 날을 가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번 연휴에 나 자신에게 고의적인 휴식을 주며 말했습니다. 마치 평소에는 부지런했던 것처럼 유난하게 굴지 말라고. 그랬더니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저층부에 머물던 나의 자아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웬일로 상층부다운 생각을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내년에는 무얼 해 먹고살지 같은 질문이요. 그런 고민을 포함하여, 어느 팀장 나부랭이의 아주 솔직한 하루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요즈음의 삶은 단순합니다. 읽고, 운동하고, 쓰고, 익힙니다. 휴무인 오늘은 오전에 발레와 운동을 다녀왔는데, 인바디 하는 날이라 몸의 각 부분을 계량하여 목표에 적합하게 변하고 있는지도 확인하였습니다. 정말이지 30대 이상의 몸을 가꾸는 일은 고단합니다. 미관상의 이유보다는 생존하기 위한 일이 되는데 품은 점점 더 드니까요. 운동을 마치면 거의 언제나 근처 서점에 들러 생각나는 주제의 책을 찾곤 하는데, 올 가을엔 나의 오래된 반려인 언어학을 다시 읽기로 했습니다. 삶이 적적할 때 설레게 하는 몇 안 되는 존재라 나이 먹으면 관련한 분야의 논문을 내보고 싶은데 잘 될지는 신의 뜻에 달렸겠지요. 이러나저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게 뭔데 씹덕아] 일뿐입니다. 귀가하면 원두나 찻잎을 갈아와 끓인 후 몇 가지 골라둔 책을 필사하고, 약간분의 2~3가지 언어 공부를 합니다. 이 또한 그다지 쓸 데는 없습니다. 지인이 말하길 유배 가서 비 오는 날 붓글씨 쓰는 선비 느낌인데 맞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삶을 살다 보면 삶의 많은 의문과 부딪히지만, 그만큼 그것들을 평온하게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평온함으로 가는 길에 무수한 허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해탈을 위해 먼저 '공'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최근 들었던 말 중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예시를 들어 볼까요. 누군가 나에게 소개팅이나 연애를 요새 안 하냐고 물어봤고, 업계에서 만나긴 애매한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얘는 신분이 높고 너무 앞서나가고 있어서 아무나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일단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나야 빈한한 소시민일 뿐이니 '또래 대비 성공한 사람이라 아무나 만나기에는 부담스럽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은 나의 세계를 강하게 때려 금을 가게 하는 몽둥이였습니다. 누가 나를 보는 시선이 내가 나 자신을 대하는 것과 다른 건 알았으나, 나의 '성공'을 절대적인 수치로 판단하는 단어 선택이 놀라웠지요. 신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 태생적으로 타고난, 불가변의 것이니까요. 나는 나의 '성공'을 늘 헌신짝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냥 일만 하고 살다 보니 한동안 연애 건수가 없는 것뿐입니다. 친구여 그런 단어로 멀쩡한 사람 혼삿길을 막지 말아 주오.
그 지점에서 나의 허무를 마주하였습니다. 나의 '성공'을 헌신짝처럼 여긴 이유는 언제라도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준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직급 - 극단적으로 이 회사 망하면 없는 자리입니다. 다음 직장에서도 관리자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나이와 회사 규모 대비 높은 직급이란 건 젊기 때문에 다음 자리로 옮길 경우 직급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계급장 달고 실제로 '높아졌다고' 생각하여 성장을 멈추고 옆사람 괴롭히기만 하는 양반들을 무척 많이 봤습니다. 유명세 - 연예인만큼 알려진 것 아니면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유명하면 반대로 한순간에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인맥 - 재미있게 봤던 모 웹툰의 말로 비유하면 본인이 가치가 있어야 발동되는 사회적 신경망입니다. 경제적 자유 - 업계를 잘못 골라서 아직 멀었습니다. 이러니 헌신짝 정도면 많이 쳐준 것 아닙니까?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데요. 내가 '성공'에 두는 유일한 가치는 단지 내가 정당하게 노력하여 얻게 된 '성취'들을 사랑하는 연속선입니다. 그리고 그건 그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만족시켰다는 쾌락적 해석도 되겠습니다.
이렇다 보니 연휴 동안 다가올 내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한 회사를 꽤 오래 다녔기 때문에, 이직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고, 무얼 하고 살아야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지의 번뇌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정말로 꽂히면 욕조에서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를 외치며 어느 길로 달려갈 수도 있지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철저하고 거창한 미래 계획을 작성하는 대신 단순한 삶을 살며 내 마음이 가는 길을 가보려 합니다. 팀장이니 성공한 삶이니 뭐니 해도 사람이 왕자나 거지가 되는 건 순식간이라 앞일 모른다는 거지요. 비록 원하던 성공을 얻어도 끝없는 욕망에의 고민을 해야 한다는 점 또한. 더불어 당장 다가올 내일에 대한 준비도. 내일은 새 팀원이 출근하는 날인데, 사흘 후 대목을 앞둔 프로젝트가 있어 첫날 정시보다 훨씬 일찍 출근하라고 요청해 두었습니다. 예의상 나도 일찍 나갈 테지만, 첫날부터 블랙기업인지 의심하며 오실 것 같기에 귀여운 표정을 장착해 볼까 합니다. 심지어 모레 국내 출장이라 그날부터는 덩그러니 버려둬야 해서 더욱 이미지가 안 좋을 예정이라 입은 다물고 법인카드나 내밀렵니다. 칼퇴근 시켜주는 팀장은 어려워도 밥 사주는 팀장 정도는 가능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