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불 좀 주소>
정말 우연히 알게 된 영화, 봉준호 감독이 예전에 찍은 단편영화인가?, 이런 생각으로 보게 된 <불 좀 주소>, 이 작품은 2009년에 제작된 7분 55초짜리 단편 영화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배우로 나오는 영화라서 시선을 끌었던 영화이기도 하지만, 짧은 영상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투영한 이야기는 '나' 또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게 합니다.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다 지친 남자(담배 남), 바람을 맞힌 친구에게 전화를 합니다. 2시간 30분이나 기다렸는 데다가, 그 친구가 먼저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니, 화가 날만도 합니다. 빌린 물건도 제때 돌려주지 않는 친구, 게다가 담배 남에게 빌린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남자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해서, 비 맞지 말라고 빌려준 우산, 담배 남에겐 아주 중요한 우산이었기에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그 친구는 애초에 돌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지금 그 우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담배 남은 화가 납니다. 우산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치고 펄쩍 뛸 노릇입니다.
불만 붙인 담배를 들고, 친구와 통화를 하며 잠수교를 걸어가는 담배 남 앞에 기타를 든 남자가 나타나 담배 불 좀 빌려달라고 말합니다. 남자는 빌려줄 불이 없으며, 자신도 빌린 것이라 말하며 다시 걸어갑니다. 그런데 기타 남이 다시 담배 남을 붙잡아 세웁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래를 한 번만 들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담배 남은 약속이 있다면서 거절을 하고 다시 걸어갑니다. 자작곡이라며, 한 번만 들어줄 것을 재차 부탁하는 기타 남, 담배 남은 화가 납니다. 가뜩이나 짜증 나서 미칠 지경인데..., 불도 노래를 들어줄 시간도 없다며 화를 내는 담배 남...,
친구에게 낙타봉 추락방지표지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담배 남,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무심코 뒤를 돌아본 담배 남, 그런데 기타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잠수교 반대편까지 걸어갔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당황한 듯한 담배 남 뒤로 추락방지표지판이 보이고, 무심한 듯 흐르는 강물을 비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봉준호 감독이 배우로 나오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지만, 담배 남이 친구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첫 장면부터 기타 남을 만나는 장면까지 화면 분할로 보여주는 영상이 더욱더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특히 한 화면 속에 기타 남과 담배 남의 얼굴 표정을 담아낸 장면은 특히 더 인상적으로 남을 듯합니다.
기타 남의 부탁은 그 누구도 '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담배 남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더라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게 되지는 않았을까? 만약 담배 남이 기타 남의 노래를 들어주었더라면, 담배 불을 빌려주었더라면, 기타 남은 잠수교를 건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만약 담배 남과 약속을 한 그 친구가 제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타났더라면, 빌려 간 물건들을 제때에 다 돌려주었더라면, 기타 남의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길을 가다가 누군가에게 이런 부탁을 받는다면 흔쾌히 들어줄 것인가? 감정이 격해져 화가 치미는 상황에서도 '나'는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 기분에 휩쓸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불 좀 주소>입니다.
굳이 덧붙임, 봉준호 감독 필모그래피를 보면 2009년에는 자신이 감독한 <마더>와 더불어 <불 좀 주소>에 기타 남역으로 주연 배우를 했다는 것이 나옵니다. 또한 김지운 감독의 2012년 개봉작 <인류멸망보고서>에는 카메오로 나온다고 하니, 그 영화에선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또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