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나에게 준 가장 큰 효과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음악이다. 이 영화의 OST도 좋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다른 음악도 전반적으로 다 좋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지브리 스튜디오 음악은 노동요로서 최고다. 사무실에서 집중력이 바닥을 칠 때 지브리 스튜디오 음악을 틀어놓고 일을 하면 일의 효율성이 꽤 높아진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애니메이션을 법률로 풀기란 참 애매하다. 특히 이 영화처럼 판타지 애니메이션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영화 속 하늘을 나는 장면, 음악, 분위기와 기발한 상상력이 좋았던 이 영화를 통해 계약이란 무엇인지 기본 내용을 살펴보고, 우리 인생에는 알게 모르게 무수히 많은 계약관계가 존재하는데 그때 한 번 적용해보자.
* 이하 스포 있음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줄거리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모자 가게에서 일하는 10대 소녀 소피가 어느 날 밤 영업이 끝난 시간에 찾아온 황야의 마녀로부터 저주를 받아 90세 노인이 되고, 그 저주를 풀기 위하여 하울을 찾아 나서면서 벌어지는 모험을 그린 이야기다. 소피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찾기 위하여 마법사들만 산다는 계곡으로 향하는 도중에 산 중턱에 거꾸로 처박힌 순무 허수아비를 바로 세워주면서 순무 허수아비의 도움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들어온 소피를 보고 1층 벽난로에 거주하는 불의 악마 캘시퍼는 소피한테 제안을 한다.
자신은 계약 때문에 하울한테 혹사당하고 있는데 자신을 성에 묶어둔 저주에서 풀어주면 나도 소피의 저주를 풀어주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소피가 그 성에 거주하는 소년 마르클 앞에서 불(캘시퍼)을 이용하여 요리를 하려고 할 때 캘시퍼가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소피는 캘시퍼한테 나지막이 말한다. "우리의 거래를 하울한테 일러도 돼?"
계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청약'과 '승낙'의 합치가 있어야 한다. 청약이란 일방이 타방한테 일정한 내용의 계약을 체결할 것을 제의하는 의사표시고, 승낙은 청약에 대응해서 계약을 성립시킬 목적으로 청약자에 대해 행해지는 청약 수령자의 의사표시다.
예를 들면, 가격 정찰표가 붙은 상품을 진열대에 올려 둔 행위는 청약의 의사표시에 해당한다. 즉, 이 가격이라면 물건을 팔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고, 가격이 붙은 그 물건을 사는 행위는 승낙의 의사표시에 해당한다. 만약 가격표가 없는 상품을 진열대에 올려 두었다면 얼마에 팔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약의 유인은 될 수 있어도 청약의 의사표시는 아니다. 비슷한 논리로 자동판매기 설치도 청약에 해당한다. 누구든지 자동판매기에 적혀있는 금액을 (현금이나 카드로) 지급하면 해당 상품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약'과 그것을 사는 행위를 통해서 '승낙'의 의사표시가 서로 합치하면 계약은 성립된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계약을 체결하는 행위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캘시퍼가 먼저 소피한테 내 저주를 풀어주면 니 저주도 풀어줄게 라고 말을 한 것은 청약이다. 그리고 소피가 즉시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날 우리의 거래라고 말을 함으로써 캘시퍼의 제안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승낙했고, 이렇게 두 사람(캘시퍼를 권리의 주체로 전제함) 사이에는 계약이 성립되었다.
민법에는 15개의 계약 종류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형계약이라고 한다. 그러나 계약은 당사자가 합의하기만 하면 위법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그 내용을 정할 수 있고 민법에 규정이 없는 계약을 비전형계약이라고 한다. 실무상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할 때 '용역계약, 컨설팅 계약'이라고 많이 쓰는데 계약의 종류가 명칭에 구애받는 것은 아니다. 즉, 분쟁이 생기면 계약의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계약의 내용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고 당사자는 이에 구속된다. 캘시퍼와 소피가 체결한 계약도 비전형계약에 해당하고, 그 계약내용은 각자 서로의 저주를 풀어줄 의무를 부담하는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의 계약이 현실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이 계약의 명칭은 '(저주를 푸는) 저주폐지 용역계약'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계약은 일반적으로 00 계약서라는 형식으로 문서로 체결하지만, 문서로 체결하든 구두로 체결하든 효력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구두계약은 사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입증이 곤란하므로 문서로 체결할 것을 권장한다. 실무상 구두로만 계약을 하면 사후에 계약의 내용은 차치하고, 계약을 체결했다는 계약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문서가 가장 적합하지만, 최소한 카톡이나 문자로라도 그 내용을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캘시퍼와 소피는 말만 주고받았을 뿐 문서를 작성한 것은 아니므로 구두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소피가 과거로 가서 알게 된 캘시퍼의 비밀은, 소년 하울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 캘시퍼와 어떤 거래(계약)를 하고 그에 따라 캘시퍼는 하울의 심장이 되었다. 그래서 하울의 심장에서 캘시퍼를 꺼내 주는 것이 캘시퍼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다. 그리고 소피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해석이 다양하지만) 소피가 원래 소녀였던 나이에 맞게 적극적이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서 하울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면 다시 자신의 나이에 맞는 외모로 돌아간다.
계약에 따라 캘시퍼와 소피는 상대방의 저주를 풀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데, 황야의 마녀가 하울의 심장에 집착하여 캘시퍼를 손에 꽉 쥐고 안 놓아주려고 하자 소피는 황야의 마녀 손에 꽉 쥐어진 캘시퍼가 죽을까 봐 캘시퍼한테 물을 부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캘시퍼는 불의 악마이므로 물을 부으면 일반적으로 불씨는 꺼지면서 죽는다.
만약 소피가 부어버린 물 때문에 캘시퍼의 불씨가 꺼져버렸다면 둘의 계약관계는 어떻게 될까
소피의 계약상 의무는 캘시퍼를 하울의 몸에 묶어둔 저주에서 풀어주는 것이 그 내용인데 캘시퍼의 저주를 풀기도 전에 물을 부어서 캘시퍼의 불씨를 꺼뜨려 버리면 소피의 의무는 이행불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채무불이행의 한 내용인 이행불능이란 계약이 성립한 후 채무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계약의 이행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계약체결 당시부터 불능인 경우에는 원시적 불능이라고 한다. 주의할 것은 이행불능이 되려면 채무자의 귀책사유(고의 또는 과실)가 있어야 한다.
소피가 황야의 마녀한테 물을 부어서 캘시퍼의 불씨가 꺼지는 것이 소피의 고의나 과실에 의해야 하는데, 물을 부으면 불이 꺼진다는 것은 상식이므로 소피한테는 고의로 캘시퍼의 불씨를 꺼뜨릴 의도는 없었더라도 적어도 불씨가 꺼질 수도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소피의 과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론, 황야의 마녀가 캘시퍼를 손에 꽉 쥐어서 캘시퍼가 죽을까 봐 급한 마음에 황야의 마녀한테 물을 부은 것을 보면 캘시퍼를 살리기 위한 행동이므로 소피한테는 과실이 없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것은 해석이 다양할 수 있으므로 다투는 입장에서는 각자에게 유리한 내용을 열심히 주장하고 입증해야 한다(그러나 물을 부으면 불이 꺼지는 건 상식이니 과실이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지 않나 싶다).
만약, 캘시퍼의 불씨가 꺼지고 소피한테 과실이 인정되어 이행불능으로 판단되면, 그 효과에는 손해배상, 계약해제(최고 필요 없음), 대상청구권이 있다.
영화에서 소피가 캘시퍼한테 물을 부었지만 캘시퍼는 불씨가 약해졌어도 완전히 꺼지지 않았고, 과거를 갔다 온 소피는 황야의 마녀 손에 불씨가 약하게 남아있는 캘시퍼를 건네받아 하울한테 심장을 돌려주고 캘시퍼를 하울의 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 줌으로써 소피는 캘시퍼와의 계약상 의무를 이행한다. 소피도 자신의 나이에 맞게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원래 자신의 나이로 돌아왔으므로 소피의 저주도 풀리고, 이로써 두 사람의 계약은 목적을 달성하고 종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