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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grace Mar 16. 2024

1화. 나의 희주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부-1화

희주가 며칠 전부터 몇 번씩 같은 약속을 확인했다.

10월의 어느 날, 금요일 저녁. 잊지 않았지?

오늘이야!


희주는 가족만큼 친한 오빠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인디밴드의 공연이 열린다고 했다.

자기가 요즘 푹  빠진 밴드의 보컬 오빠를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그리고 한참을 보컬오빠 프로필을 나에게 읊어대었다.


희주가 인디밴드의 공연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부터 이미 내 마음은 공연장에 가있었다.

하지만 희주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고민하는 척 연기를 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아니, 아빠는 집에서 대중음악을 비롯해 밴드 음악을 듣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어린 내가 유행가를 따라 부르기만 해도 그 다정하셨던 아빠의 표정이 냉담하게 변하곤 했다.

화를 내거나 과음을 치거나 때리는 것이 아닌, 그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떼어 놓고 방으로 들어가시던 모습이 어찌나 두려웠는지. 엄마도 그저 아무 말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집 안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 가끔 엄마가 클래식 음악을 틀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부모님 몰래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그 어느 곳보다 학업 경쟁이 치열한 과학고를 진학하면서 나는 잠시라도 숨을 돌릴 공간이 필요했다.

나에게 그곳이 교실 안,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속의 음악이었다.

온갖 새로운 가수와 음악이 나의 사춘기 감성을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특히 밴드 음악은 나에겐 새로운 세계였다.

단출한 악기나 실험적인 리듬 속에서 나오는 보컬의 목소리가 단 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음악은 잘 몰랐지만 나의 음악적 취향을 찾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희주는 그런 나의 마음을 유일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희주가 좋다면 무조건 좋을 것이다.

혹시나 만족스럽지 못하더라고 대단히 감동적이었다는 연기를 완벽하게 할 자신도 있었다.


희주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같은 학원 강의실에서였지만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과학고에 같이 진학하여 같은 반이 되면서부터였다.

희주는 뭐든지 시시해하는 나와는 달리 항상 밝고 긍정적인 아이였다.

늘 새로운 물건이나 새로운 가십거리를 나에게 들고 와 밉지 않을 정도로 호들갑을 부렸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그런 성품의 아이였다.

그런 희주가 나를 자신의 베스트프랜드라고 명명해 주었을 땐 사실 너무 기뻐 그녀를 안고 뱅뱅 돌고 싶을 정도였다. 역시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희주는 나의 무심함이 부럽다고 했다.

작은 전쟁터 같은 과학고에서 학생들은 항상 서로를 경계해야 했다. 간혹 상대를 까고 내리기 위해 심심치 않게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나 역시 그 음모론에 걸려들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건 학습적인 것이 아니라, 보통은 난잡한 이성관계라든지 부정한 청탁 같은 것이었다.

한 번은 여자 아이 몇 명이 와서 내가 정리한 노트를 빌려 간 적이 있다.

약속한 시간이 한 참 지나서야 노트를 가져다주었다. 실수로 커피를 흘렸다는데 노트의 절반이 얼룩져 있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아이들의 입 안에서 비열한 미소가 느껴졌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괜찮다고 말하고 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로 그 노트를 쓰레기통에 쳐 박아버렸다.

그리고 그 회 전국모의고사에서 반 1등을 해버렸다.

밟아도 밟히지 않으면 밟을 의미가 없다.

희주는 그런 나를 치켜세우며 유일하게 내 옆에 남아준 아이다.


희주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로 오래전부터 다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인 한국대에 나란히 입학을 했다.



그런 희주가 같이 밴드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한 날이 그날이었다.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흩어지기 시작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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