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부 3화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의 풍경이 이상 할 정도로 낯설었다.
똑같이 없음에도.
있다가 없어지니 간절해졌다.
우재 오빠가 급하게 희주와 나에게 달려왔다.
"집으로 가지 말고 기다려. 같이 밥 먹자. 빈스밴드 뒤풀이 같이 가자"
희주가 기겁을 하며 다시 한번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정말? 우리가 거기 가도 되는 거야?"
희주가 주변을 의식하며 우재 오빠 얼굴 가까이 다가가 소리 낮춰 확인했다.
"내가 미리 말해놨어. 여기서 기다려. 정리하고 바로 나올게. 설이 씨도 기다려요"
우재 오빠가 나를 보고 도장을 찍듯 말했다.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반듯하게 미소 지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우재 오빠가 자리를 비우자 희주가 제발 같이 가달라고 두 손을 비비며 나에게 애원했다.
나는 이미 그러기로 마음먹었지만, 이번에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다.
뒤풀이 장소는 우재오빠 가게 건너편 작은 이자카야.
나와 희주는 우재 오빠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우재 오빠는 익숙한 듯 이자카야 젊은 남자 사장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빠가 나와 희주를 그가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무대 위에서 봤던 밴드 팀원들과 드럼을 치던 남자 옆으로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들 스스럼없이 우재 오빠와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는 내가 말했던 빈스 밴드의 찐 팬. 박희주. 지금 한국대 3학년"
희주는 늘 실전에 강하다. 내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녀처럼 굴다가 막상 그 앞에선 어른처럼 침착하게 자기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희주가 나를 보며 눈치를 줬다. 나는 아차 하는 마음으로 "아, 안녕하세요. 이설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내가 오랜만에 가증스러웠다.
우재가 나의 소개를 덧붙였다.
"여기도 한국대 3학년. 공대."
"와, 진짜 멋지다" 무대에서 키보드를 치던 남자가 손뼉을 치며 감탄하며 말했다.
자신을 키보드 치는 '승재'라고 소개했다.
승재의 순수한 감탄에 희주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드럼을 치는 건욱도 그 옆에 앉은 여자친구 지연도 기타를 치던 현록도 함께 웃었다.
그도 웃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잠재워질 때쯤 건욱이 희주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희주 씨는 당연히 해빈이 보고 왔겠죠?"
희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 해빈이가 콩깍지 두 분을 또 영입했네요. 해빈이가 정말 우리 밴드 먹여 살립니다."
건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설이 씨도 해빈이 보고 온 거 맞죠?" 건욱이 나를 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마시려던 물을 내려놓고 더 이상 찐따처럼 굴지 않으려 머리를 굴려가며 말을 찾았다.
"설이는 제가 오늘 억지로 끌고 왔는데, 아마 오늘 부로 콩깍지 제대로 씌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도 희주가 나 대신 답을 해주었다.
희주의 말은 정답이었고 대신 말해준 것은 다행이었다.
그가 내 쪽을 보고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갑자기 숨이 몰려왔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내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모든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숨이 가빠져 와 얼른 찬 물을 들이켰다.
나는 술을 자주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주량을 체크할 만큼 마셔 본 적도 없지만, 적어도 내가 취하길 바라며 술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절대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그런 내가 나에게 술을 권하고 있다. 이번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리.
희주가 그런 나를 염려하는 표정으로 안주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빈 속에 소주를 밀어 넣고 있었다.
그걸 알아버린 순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찬 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나 화장실 좀..." 희주 귀에 대고 말하고 나서 일어나 가게 밖으로 나왔다.
가게 밖으로 나와 10월 찬 밤바람을 허파 깊이 밀어 넣었다.
주변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우재 오빠가 가게 밖으로 나와 내 등 뒤에 서서 물었다.
"아, 네...." 나는 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아이스크림 사려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아이스스크림요?" 나는 내 발음이 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입을 가렸다.
우재 오빠가 피식 웃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