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14일차

by 채윤희

좋아하는 결의 공간이라는 데 눈이 멀어 서비스업의 고단함을 잊었던 자, 벌을 달게 받으라. 오늘은 분위기 하나에 눈이 멀어 지원했던 리스닝 펍으로의 출근 첫날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사장님은 "적을 것 있으세요?"라 물었다. 그리고는 내가 맡을 일을 속사포처럼 뱉기 시작했다.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았다. 처음 보는 음향 장비도 다뤄야 했고,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데에도 사장님의 취향을 고려해 수동 머신으로 내려야 했다. 그런데 나는 수동 머신이라는 게 있다는 것조차 오늘에서야 알았다. 2017년을 마지막으로 포스기도 만져 본 적이 없는데 새삼 이곳에 지원하자는 용기가 어디서 나온 건가 싶었다. 많은 걸 배우고 싶어서 도전해 놓고는, 배울 게 많아지니 머리가 아프고 걱정이 앞섰다. 느긋한 성정의 나에게는 솔직히 출근 30분째부터 과부하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파트 타이머가 일을 느긋하게 배운다는 건 오만한 생각이었다.


나는 당장 모든 것을 숙지하고 바로 실전에 투입되어야 했다. 포스기 설명이 끝나자마자 첫 손님이 들어왔다. 사장님은 "받아 보세요" 하셨고, 한 번은 먼저 보여 주실 줄 알았던 나는 "바로 받을 수 있을까요?"라 물었다. 사장님은 "왜 못 해요?"라 답했다. 정말 별것도 아니지만 너무, 너무, 너무 떨렸다. 실수할까 봐. 짜장면 주문도 스크립트 써 놓고 외우는 사람에게 준비된 멘트 없이 주문을 받으라는 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기지를 발휘하여 여차저차 주문 실수는 없었지만, 나는 곧바로 음료까지도 곁눈질로 한번 본 걸 바로 만들어 내야 했다. 나는 잘 기억하지 못했고, 점점 기가 죽어서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안 나요....",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 눈을 굴리기 일쑤였다.


사장님의 교육 방식은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스타일었다.

#1. 수동 커피 머신에 커피 포트를 끼운 뒤 다음 스텝이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굴리는 나

사장님: 어떻게 해야 커피가 내려지겠어요? 여기에 뭐가 필요해?
나: (골똘히 생각한 후) 어... 물이요.
사장님: ㅇㅇ 빨리 넣어
#2. 딸기청과 우유를 섞은 뒤 크림을 올렸어야 했는데 섞지 않고 크림을 올려 당황한 나

사장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 다시... 만들어야 돼요...
사장님: 어떻게 다시 만들 거야?
나: (ㅠㅠ) 버... 버려야...
사장님: 크림만 걷으세요.
#3. 딸기라떼 다시 제조 후 음료를 앞에 두고 머릿속이 혼잡해진 나

사장님: 왜 청과 우유를 잘 섞어서 서빙해야 할까요?
나: (잠시 침묵) 안 섞으면 과육이 가라앉아 있어서?
사장님: 그것도 맞지만 과육이 무거워서 빨대로 안 빨아들여져요.
나: 아 맞네요...
사장님: 꼬.
나: 꽃이요?
사장님: 꼬. 가져다 드리라구요.
나: ㅠㅠ 꽃 장식 해야 된다는 줄 알았어요 ㅠㅠ (후다닥 나간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장님은 정답을 알려 주는 것보다 정답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참된 스승 같기도 하다.... 3번 장면은 웃으며 마무리되었는데, 그 순간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홉 살 무렵, 아빠 회사 망년회에 따라 간 적이 있다. 아이들은 나이대가 비슷해, 아빠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 다른 방에 모여 이런저런 게임을 하며 놀았다. 언니들을 주축으로 초성 게임이 시작됐다. 초성 두 자를 말하면, 돌아가면서 낱말을 한 개씩 말하는 게임이었다. 어린 나는 그 게임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해 본 적도 없었고, 그냥, 못할까 봐. 어버버댈까 봐. 그리고 벌칙에 당첨될까 봐. 처음 해 보는 것을 못하면 그게 그렇게 부끄러웠다. 언니들이 같이 하자는 말에도 몸을 배배 꼬며 싫다고 했다. 그때 한 언니가 말했다.


"깍두기 시켜 줄 테니까 같이하자."

"깍두기?"

"깍두기는 져도 벌칙 없는 거야."


깍두기라는 방패를 얻은 나는 게임에 쭈뼛쭈뼛 참여했다. 그렇게 시작된 게임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몇 개 낱말도 맞췄고,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결국 더 이상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니들은 신나게 외쳤다. 5, 4, 3, 2, 1—


나는 1초 남기고 울부짖듯 외쳤다.


"나 깍두기잖아!!!!!!!"


언니들은 깔깔 웃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맞아, 깍두기라 벌칙 없어. 너 귀엽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다 같이 웃으니 나도 웃음이 터져나왔다.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부끄러웠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 해 보는 걸 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이 마음에 새겨진 건.


아홉 살의 나를 떠올리며 퇴근길 지하철에 올랐다. 얼굴에 열이 올랐고, 다리가 아팠고, 땀이 뻘뻘 흘렀다. 이제 나는 깍두기도 못 되는데 어쩌나. 내일은 잘할 수 있으려나. 나랑 자영업은 어울리지 않는다던 주변인들의 말도 떠오르고.


그럼에도 나는, 오늘 배운 걸 외우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수동 커피 머신 사용법을 검색해 찾아보고, 열심히 레시피를 복기해 제조법을 불렛 포인트로 작성한다. 늘 ‘다음엔 잘해야 돼’가 내 속마음의 배경음처럼 흐른다. 어쩌면 나는 모든 걸 학습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과연 이런 곳에 어울리는 인재일까. 생각이 또 맴돈다.


타고난 일을 하고 싶다. 처음부터 잘하고 싶다. 부끄럽기 싫다.


대체 나에게 ‘부끄러움’이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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