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명상
물에 몸을 맡기고 흐름을 느껴본다. 가볍다.
어디론가 움직이며 가까이 존재하는 낙엽과 작은 물살이와 돌을 느껴본다.
물의 온도를 느껴본다. 차갑다.
차가운 물이 내 몸의 온도를 낮추며 돋아나는 피부의 변화를 느껴본다.
햇빛이 내 몸에 닿는 기분을 느껴본다. 따스하다.
햇빛이 내 몸에 채우는 에너지를 느껴본다.
물속에서 부유하는 물질들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자연은 끊임없이 일하지만 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다.
모든 것을 연결하고 또 연결한다.
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떠난 북한산자락 계곡에서 나는 물놀이를 하다 말고 둥둥 떠서 쉬고 있었다. 물속에서 흐르는 소리, 작은 돌멩이나 나뭇잎 조각들이 몸을 스쳐 지나가는 느낌, 머리 위로 살랑거리는 나뭇가지, 천천히 흘러하는 구름들. 오감이 열리면서 나를 둘러싼 세상이 드러났다. 그 순간만큼은 현재에 살게 되었다.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뭘까. 자연의 네트워크가 탄탄하다면 하나가 끊어진다 한들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거미줄을 짓는 거미처럼 꾸준히 연결하고 끊어지면 보수하여 회복시키고 싶다.
행복은 어느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렇지만 내 소비가 많은 것을 죽이는 일방향의 생산 시스템 안에서 과연 만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나. 나는 언제나 부족하다고 인식하고, 더 착취적인 소비를 갈구하게 되는 더러운 욕망을 만든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삶을, 어떤 생태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잔인한 욕망을 만든다.
폐기(죽음)에서 생산(삶)이 연결되는 순환의 생산 시스템 안에서라면 만족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선택이 누군가를 파괴하지 않고도 충분히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자랑하지 않고도 스스로 건강한 마음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혐오를 멈추고 타인을 돌보고 돌봄 받으며 서로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행복(평안)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욕망에서 벗어나 진짜 만족을 추구하며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욕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태주의에 대한 탐구는 나의 욕망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그런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둘씩 알아갈수록 욕망은 더욱 커져갔다. 자연에 안전하게 머물고 싶은데, 이를 어렵게 만드는 여전히 건재한 시스템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어떤 형태의 욕망이건 현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나를 힘들게 만든다. 추구하는 이상향이 있는 것은 좋지만 미래에 대한 집착은 나의 현재에 불만을 심는다. 멋진 생태적인 삶을 사는 타인에 대한 동경, 추구하는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이 불만의 근원은 파괴적 생산 시스템과 순환적 생산 시스템 중 어디에 내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아니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의 태도이다. 집착할수록 내 불만은 커져갔고, 욕망은 나를 집어삼켰다.
과학에는 선과 악은 없고 원인과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윤리적 담론은 변화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우생학으로 발전시킨 이들의 사상을 지금의 윤리에 적용하면 명백한 악이듯, 자본이 착취를 무시하고 어쩔 수 없다 정당화하는 시스템은 미래에는 명백한 악이 될지도 모른다.
과학적 인과관계에 따르면 내가 더럽고 잔인한 욕망이라고 칭한 것을 추구하면 인류는 생사의 위험에 빠질 것이고ㅡ사실 위험은 이미 시작되었다ㅡ순환 고리의 회복을 욕망하면 인류는 조화로운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선택은 개인의 윤리적 판단에 따른다.
나는 여전히 집착하고 욕망한다.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불행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명확하게 안다. 그렇기에 추구하는 삶이 있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길을 닦으려 홀로 애쓴다.
나는 욕망의 생태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