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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Sep 19. 2024

혐오의 장벽

나의 기준으로 나를 검열하고 타인을 판단할 때

'자리이타 이타자리(自利利他 利他自利)'
'자리' 추구가 '이타' 행위의 목적이고 동기다. 한편 '이타'는 '자리' 추구의 사실상 유일하게 정당한 방법이다.



한 의료대란 관련 칼럼에서 본 문장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그렇구나, 인간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맞다. 이제 그만 인정해야겠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의사들을 속으로 비난했는데, 나 또한 이기적이고 내 심신의 편안함이 우선인 사람이다. 사실 나는 그동안 이를 인정하기 싫어했다.


나는 기후정의 운동을 하면서부터 내 안의 강력한 윤리 원칙에 사로잡혀서 인간은 '이타' 행위를 하며 사는 것만이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라고 믿어왔다. 기후불평등은 사회적 인프라에 접근성이 부족한 약자에게 더 취약하고 부유한 자들이 배출하는 탄소가 약자들을 더 힘들게 만든다. 작년 리비아 최악의 홍수로 2만 명이 하루아침에 죽은 사건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네팔 히말라야 지역의 빙하 쓰나미로 마을 전체가 매몰되는 사건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이 국가들이 배출한 탄소는 미미하다. 이들을 떠올리면 나의 일상적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후정의 운동을 하기에 앞서 나의 몸, 마음의 건강함을 먼저 챙기기에 바쁘다. 기후운동 단체에서 일을 하다 보니, 품을 내고자 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하게 많고 내 여건만 가능하다면 모든 연대 활동에 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몸은 하나이고 체력에도 한계가 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일단 돈을 버는 생계 활동에 우선순위를 매긴다. 또한 체력과 시간이 있어도, 심적으로 지치고 힘들면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일단 돈 버는 일을 하고, 소진된 체력을 회복하는 데에 시간을 쓰고, 자기 계발에 시간을 쓰고, 그리고 시간이 남을 때 기후 운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보다 더 품을 많이 쏟아 활동하는 활동가들을 볼 때 ‘대단하지만 나는 저렇게까진 못해' 하며 선을 긋는다. 

반대로 일상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뉴스와 징후가 쏟아져 나옴에도 별 의식 없이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또한 그들의 심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것일 텐데. 그들을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묶어 생각해 버린다.


줄곧 혐오가 없는 사회를 꿈꾼다고 했지만 사실 내 안에도 혐오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이기적인 부류들을 혐오한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한다거나 하는 사소한 배려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은 본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러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거나, 기후위기야 전쟁이야 어찌 됐건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심이 있다.

또한 겉모습만을 보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부류들을 혐오한다. 특히 월급의 액수나 자산의 크기에 따라 개인의 부지런함이나 능력을 평가해 버리는 세속적인 기준을 가진 자들을 혐오한다.


나 자신의 이기적인 성향을 합리화하면서 타인의 이기심을 비난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오랜기간 외면해왔다. 실은 기후위기 운동 또한 나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작했다. 경쟁이 덜 하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건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 

'내가 마실 공기를 니들이 뭔데 더렵혀?' 이러한 이기심에서 출발하여 '좋은 환경을 갖추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책임감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는 당위적 주장으로 많은 사회적 현상과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타’보다는 ‘자리’를 먼저 추구하는 동물이다. 기후 활동가일지라도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싶고, 가까운 거리여도 차가 있으면 차를 타고 싶고,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재물을 쌓아놓고 싶어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그러하다. 그 과정에서 경쟁이 발생하면 나의 안전을 위해 먼저 싸운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생기면 반대로 그들을 공격하게 된다. 이기심과 혐오 또한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성향일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자리’를 추구하며 남들의 고통은 그야말로 남일이 되지 않는가.


다정한 돌봄이 만연한 사회, 서로의 특별함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면서 반대로 내 안에 점점 자라나는 혐오심을 감추기 바빴다. 혐오는 그 주인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혐오는 혐오를 하는 사람을 파괴시킨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혐오를 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그 무언가가 불편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미슥거려 견딜 수 없었다.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모순되게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도덕적 규범을 추구하면 자기 자신과 사회 구성원을 끊임없이 검열하게 하고, 그렇게 내재된 규범으로 타인을 평가하며 반발심과 혐오를 만들어낸다. 나의 태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런 나를 발견할 때면 힘들고 우울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혐오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 자각해야만 했다. 혐오는 서로에 대한 장벽을 더 높이 쌓는 방법이다.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이야기하면서 그렇지 못한 타인을 혐오하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는 방법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쌓은 장벽을 다시 허물면서 타인이 쌓은 장벽을 어떻게 잘 허물 수 있을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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