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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머컬처의 맛-(4)

겨울을 버티는 짠맛

by Hoho

2022년 10~11월


10월, 한 해 농사의 화려한 막, 장아찌


더위가 가시고 온화한 가을,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씨다. 하지만 농부는 이때쯤 가장 부지런해진다. 조금만 방심하다가는 금방 서리가 내려앉을 것이라고 한다. 추위가 닥치기 전에 얼른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수확해 저장해야 한다.


도시에서 일률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역시나 성인이 되고, 자취를 할 때까지도 제철 음식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마트에 가면 다양한 과일도, 내가 좋아하는 가지랑 애호박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가까운 지역 농산물과 제철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글을 보고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그럼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겨울엔 뭘 먹지?’


장아찌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였다. 나 또한 농사를 지어보니 한꺼번에 미친 듯이 자라나는 작물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6월경부터, 땀 흘려 기른 작물을 버리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장아찌를 만들거나 김치를 만들어야만 했다.


파스타에도 김치를 곁들여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외국에 살게 되더라도 항아리에 장을 담글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릴 때는 이런저런 음식은 다 편식해도 된장찌개에 김치만 있으면 밥을 잘 먹었다. 할머니랑 같이 길을 걷다 할머니 친구분들이 “어휴, 손녀딸 무얼 먹고 저렇게 키가 컸어~?” 하면 할머니는 “된장찌개 먹고 컸지!”라며 뿌듯해하셨다. 유독 느끼한 음식을 잘 못 먹고, 요리에 간장이나 된장이 빠지면 섭하다. 어릴 적 식습관 때문인지, 직접 요리를 하면서부터는 다시 장아찌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슬슬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며 또 한 번 장아찌를 만들었다.


?src=http%3A%2F%2Fcafefiles.naver.net%2F20100319_108%2Fhy2me_12690009253048vpjk_jpg%2Fp1090232_hy2me.jpg&type=sc960_832 바닥에 딱 붙어 자라는 뽀리뱅이 (출처 : 네이버카페 '도봉구의 숲체험과 자연생태프로그램')


가는 가을이 아쉬워 한 눈을 팔다 보니 어느새 내 밭에 유독 많이 번져있는 풀이 하나 있었다. 겨울 멀칭을 하기 전에 풀을 싹 다 잡아야 한다고 해서 지표면을 빽빽하게 뒤덮고 있는 풀들을 베는데, 대체 이 풀은 뭐길래 이렇게 뒤늦게 많이 자라는 건가 궁금해하던 찰나, 소란 선생님이 알려준 그 이름은 바로 보리뱅이(뽀리뱅이). 퍼지는 속도가 무색하게 귀여운 이름에 한 번 먹어나 보자며 뿌리째 캤다. 여름 내내 무성하게 자란 호박잎도 자르고, 딜처럼 생겼는데 달달한 화장품 향이 나는 펜넬도 몽땅 잘랐다. 간장, 식초, 설탕을 넣어 끓인 물에 재워놓고 나니 겨울 반찬 하나 생겼다는 사실에 든든하다.






11월, 퍼머컬처의 다섯 가지 맛(五味)


화려한 한 해 농사가 마무리에 접어드는 11월, 나무 수관 주위로 퇴비를 슬슬 뿌려주었다. 추운 겨울 얼지 말라고 두툼한 낙엽 이불도 덮어주었다. 농사를, 그것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퍼머컬처를 배운다며 전혀 새로운 길에 뛰어든 나는 8개월여의 시간 동안 무엇을 얻었을까. 음... 허브 10여 가지의 이름을 외웠고, 나무 5가지 정도의 이름을 외운 것,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조금 더 늘어난 것?


퍼머컬처는 다양한 맛이 있다. 모기와 풀과의 전쟁은 매운 맛, 씨앗을 많이 뿌렸는데 물을 주면 안 되니 거의 발아하지 않을 때 느끼는 쓴 맛, 땡볕에 풀을 베며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의 짠 맛, 허브와 꽃 향기가 절정에 다다를 때 눈과 코와 입으로 느껴지는 단 맛. 그리고 허브 오일과 연고, 허브 음료, 풀그림 등등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이 작은 땅에 숨어있다는 것을 배웠을 때 느낀 감칠 맛. 감칠 맛을 검색해 보니 ‘1. 구미를 당기는 맛 2.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한다. 처음 퍼머컬처를 한다고 뛰어들었을 때, 어마어마한 풀의 종류에 압도당하고 잡초 베기 노동에 지칠 뻔했는데, 어느새 나는 퍼머컬처의 삶을 받아들이고 글까지 쓰고 있다. 퍼머컬처가 나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5미(五味)의 경험을 통해 나는 퍼머컬처에 입문했다.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다른 공동체원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지만 생태계의 고리가 어떻게 연결되고 척박한 땅에서 멋진 숲이 탄생하는지, 각 계절별로 어떤 식물들이 피고 지는지 엿보았던 놀라운 순간들이었다. 앞으로도 많이 넘어지면서 어엿한 퍼머컬처 농부로 성장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퍼머컬처의 삶이 떠오를 수 있을까. 아무튼 퍼머컬처,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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