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목소리
'24살이 된 노보루, 안녕! 나는 15살 미카코야.’
너와 나의 거리는 8.6광년.
미카코가 우주에서 보낸 휴대전화 메일은 8년 7개월이 지나 지구에 있는 노보루에게 닿는다. 어쩌면 ‘우주와 지구로 갈라진 연인의 첫 세대’인 두 사람은 그렇게 초장거리 메일에 의지하며 서로를 기억한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오랜 팬이다. 그가 1인 제작자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시절부터 팬이었던 나는, <너의 이름은(2017)>이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켰을 때, 뿌듯한 마음과 함께 나만 알고 싶던 감독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애니메이션을 한 편이라도 봤다면 이제는 모를 수 없는 신카이 마코토,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작품이 <너의 이름은>이었다면, 걸출한 천재의 탄생을 알린 작품은 단연 <별의 목소리(2002)>다.
25분 분량의 단편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는 신카이 마코토가 2년에 걸쳐 혼자 제작한 작품이다. 각본, 연출, 작화, 미술, 편집, 남자주인공 목소리까지. 여자주인공의 목소리와 음악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감독이 혼자 제작하고, 극장 상영까지 한 점에서 그 전례가 없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2046년, 중학교 3학년인 노보루는 미카코와 같은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기대한다. 하지만 미카코가 외계생명체 타르시안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UN 우주군의 리시테아 함대에 선발돼 우주로 향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헤어진다.
우주로 떠난 미카코와 노보루가 휴대전화로 초장거리 메일을 교환하며 마음을 이어가는 사이, 화성에서 목성으로, 또다시 명왕성으로 미카코는 점점 더 멀어지고 노보루에게 메일이 닿는 시간도 길어진다.
처음에는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던 교환시간이 반년, 1년이 걸리게 되고, 타르시안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전 함대가 태양계 밖, 시리우스로 이동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8.6광년으로 벌어진다.
이제 미카코의 메일은 8년이 지난 뒤에야 노보루에게 도착할 것이다.
지구의 시계에 맞춰 어른이 되는 노보루와 15살에 머물게 되는 미카코. 8.6광년이라는 광대한 공백은 두 사람에게 영원 같기만 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설정이 이러한 시·공간의 간극, 그로 인한 단절로 함께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다. 특히 초기작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초속 5cm(2007)>에서도 반복되는, 물리적 거리로 어긋난 두 사람이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약속을 잊지 않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설정은 <별의 목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영원 같은 거리는 ‘초장거리 메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둘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별의 목소리>가 제작된 점을 생각하면 감독의 ‘휴대전화 메일’은 현실적인 요소로써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거리와,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표현하는 장치로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주에서 보내는 메시지라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우주 공간에 떨어져 외계생명체와 싸우는 미카코는 노보루와 함께 보낸 평범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낀다. 그렇게 노보루가 자신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8년 7개월이라는 시간을 건너 그에게 전해진다.
한편, 미카코의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노보루는 혼자 어른이 되어간다. 계절이 변하고, 달력의 연도가 바뀌고, 오래된 휴대전화에 세월의 표시가 남았다. 그를 둘러싼 세계의 풍경이 변해가면서 또 한 번 우주와 지구의 시간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여기서 신카이 마코토의 영상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빛의 마술사’ 다운 면모는 그의 초기작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계절과 하루의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구름, 가본 적 없는 행성의 자연, 빛에 반짝이는 익숙한 사물들과 눈동자에 반사되는 휴대전화 화면의 모습까지. 신카이 마코토의 섬세한 빛은 영상 곳곳에서 일렁인다.
최근작품들과 비교하면 아직은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빛이 넘실거리는 하늘과, 다채로운 풍경의 연출은 인물들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별의 목소리>는 SF로맨스답게 우주에서의 함대전투도 그려내고 있다. 미카코가 탑승한 기동병기는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을 떠올리게 하는데 신카이 마코토는 실제로 에반게리온 등 많은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1인 제작임을 감안해도 그 퀄리티는 뒤처지지 않는다.
이렇게 혼자서도 완성도 높은 연출을 보여준 신카이 마코토를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별의 목소리>가 이후 신카이 마코토가 만들어낸 세계관의 출발점이었던 만큼,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그의 초기작품들을 모두 다루고 싶었다.
4분 50초 분량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1999)> 등 1인 제작 단편 애니메이션부터 <초속 5cm>까지, 대중성이 강해진 <너의 이름은> 이전의 작품들이 가장 ‘신카이 마코토’스러운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 서사를 통해 더 분명해진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최근 작품들도 좋아하지만, 그의 초기작이 가진 감성은 특별하다.
‘우주와 지상으로 갈라진 연인’처럼 둘의 사랑은 애틋하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노보루가 좋아’라고 보낸 미카코의 고백은 아득한 별의 목소리 같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속도의 시간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의 거리감은 이제 막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서로가 더 가까워지는 시대에 오히려 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손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의 아날로그적인 향수마저 느끼게 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초조하게 기다려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끝없이 지연되는 답장을 기다리다 ‘혹시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하며 이 광대무변의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을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본 이라면 <별의 목소리>가 주는 여운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음을, 그러니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한 별에서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