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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살아있나요?

컬러풀

by 작중화자

당신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유예기간은 6개월. 그동안 당신은 전생에서 지은 죄를 기억해야만 환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주어진 삶, 당신은 어떻게 살 건가요?




사후세계의 문턱에 선 나의 앞에 한 소년이 다가온다. 자신을 안내인이라고 소개한 프라프라는 내가 ‘보스의 추첨에 당첨’되어 인생에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말한다.

거절은 불가! 그렇게 다시 세상으로 던져진 나는 자살한 중학생 코바야시 마코토의 몸에서 눈을 뜬다.


모리 에토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컬러풀>(2010)은 이렇게 시작된다.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게 웬 걸.

눈을 뜬 나는 볼품없이 작은 몸에, 휴대폰에 저장된 친구 하나 없는 왕따다. 게다가 엄마는 플라멩코 춤 선생과 바람이 났고, 짝사랑하는 히로카는 원조교제를 한다.

왜 하필 이런 애의 몸에 들어와서 다시 살아야 하는 건지 암담하기만 하다.

불륜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아들을 챙기는 엄마를 용서할 수 없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히로카를 구하지도 못했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맞고 결석한 나를 유일하게 찾아온 쇼코에게는 상처만 주고 말았다.


마코토가 아닌 ‘나’로 살아보려 해도 이 삶, 만만치 않다. 무력하고 혼란하기만 한 그때, 사오토메가 나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우연한 기회로 옛 전차가 다니던 길을 함께 걸었던 사오토메는 운동화 할인매장을 알려주고, 호빵의 가장 큰 조각을 나눠주었다.

사오토메의 편견 없는 따뜻함은 6개월의 유예기간, 그 이후의 삶을 꿈꾸게 했다.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해 질 녘 편의점 앞에 앉아 진학 고민을 나누는 15살 중학생들의 평범한 일상. 나는 그 작은 순간들 속에서 세상의 색을 배워간다.


비참하다는 건, 인사를 나눌 상대가 없거나 점심시간에 홀로 남겨지는 거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가슴 찡한 일이다.




<컬러풀>은 청소년의 자살과 따돌림, 원조교제, 불륜과 같은 사회 문제를 전면에 다루고 있지만, 어떤 색깔의 인생도 모두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따뜻하고 감성적인 시선으로 담아냈다.


마코토가 자살하기 전의 날들은 모노톤이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코토는 외로웠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가족에게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학교에서는 동급생들의 악질적인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코토의 방에 걸린 그림들은 온갖 색으로 넘실거린다. 그의 삶과는 달리 아름답고 평화롭다.

마코토는 자신이 만든 흑백의 프레임 안에서 빛으로 일렁이는 세상을 바라보며 희망을 그렸던 게 아닐까.


후반부로 갈수록 세계는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어간다. 만개한 가을 단풍 앞에 선 나의 뒷모습은 내가 그린 무채색의 풍경과 대조를 이루며 앞으로 더 컬러풀해질 세상을 예고하는 듯하다.


<컬러풀>은 느릿한 호흡에 어울리는 섬세하고 풍부한 영상미가 돋보인다. 실사에서 그림으로 전환되는 장면들은 멈춰있던 과거가 복원되는 듯한 울림을 주고, 배경 묘사도 굉장히 현실적이다.

날씨와 조명의 변화는 마코토의 감정선과 절묘하게 호응하기도 한다. 히로카와 있을 땐 비가 내리지만, 사오토메와 함께할 때는 얼굴 위로 노을이 번진다.


마코토가 아닌 ‘나’로서 삶을 다시 색칠해 가던 나는, 유예기간의 끝에 이르러 자신이 바로 자살한 마코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진정한 자신의 색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하던 내가, 하나가 아닌 모든 색들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얻은 깨달음이다.

화려하고 예쁜 색으로만 인생을 칠하려고 한 히로카의 어두움 또한 그녀 자신이며, 그걸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그래서 ‘이상해도 괜찮다’는 마코토의 말은 곧 자신을 향한 위로다.


사오토메가 마코토의 삶에 큰 의지가 된 것처럼, 마코토는 쇼코의 용기가 되었고, 히로카의 위안이 되었다.

프라프라의 마지막 말대로, ‘나’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다.

자신의 색을 알지 못해 흔들리는 청소년들이 그림을 그리는 설정은 상징적이다. 수없는 붓질로 물감을 겹겹이 쌓아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듯, 우리도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칠해가며 살아간다.

어떤 날은 회색일 수도, 어떤 날은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색일 수도 있다. <컬러풀>은 그 모든 색이 어우러진 인간의 존재 자체를 찬미한다.


진정한 나의 색이라는 것은 없다. 내가 정한 색은 나를 가두는 선입견일 뿐이다. 마코토가 그린 그림을 히로카는 하늘을 나는 말로 보고, 쇼코는 수면을 향해 헤엄치는 모습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리도 정답이 없는 그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채로운 시선들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다. 마코토가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처럼, 변화는 가족에게로 번져간다.


가정에 무관심하던 아빠는 이제 식탁의 한 자리를 지키고, 매번 마트에서 사 온 반찬으로 저녁을 차리던 엄마는 손수 전골과 함박스테이크를 만든다.

무뚝뚝하기만 하던 형은 동생의 진학을 함께 걱정해 준다.


마코토가 엄마가 사 준 하늘색 외투를 입고 사오토메를 만나는 마지막 장면은 가족의 회복을 나타낸다. 서로 외면하며 분열되어 있던 가족이 다시금 연결되는 지난한 과정은 묵직한 감동을 준다. 그렇게 가족은 마코토의 또 다른 버팀목이 되었다.




마코토의 영혼이 다시 돌아간 자리엔 화사한 꽃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 꽃나무는 결국 마코토가 이룰 자기 이해와 수용의 결실일 것이다.


우리 존재는 다양한 색의 층위를 이루고 있다. 모든 색은 자신의 일부이며, 그 자체로 스스로 빛난다.

그러니 기꺼이 품어주자. 세상 모든 색들을.



당신, 하게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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