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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고슴도치들에게 바치는 헌사

신세기 에반게리온

by 작중화자


'잔혹한 천사처럼,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곡 중 가장 사랑받는 노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류의 존망을 책임지게 된 어린 소년에게 신화가 되라는 강렬한 한 마디는, 단순한 주제곡 도입부에 머물지 않았다. 이는 곧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명제이며, 신화를 상실한 9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렇게 노래는 밀리언셀러가 되고,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며 그 자체로 신화가 된 애니메이션계의 GOAT(Greatest Of All Time), TV방영 30주년을 맞은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이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평가되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단순한 SF오락물이 아닌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은 철학적인 작품이다.


에반게리온이 방영된 1990년대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후일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게 되는 장기불황이 시작된 때다. 80년대 경제 부흥기의 종식과 함께 주가 폭락, 실업률 증가와 가정해체로 일본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사회 전반에 팽배한 불안과 고립은 나아가 사람들의 정체성 상실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혼란한 사회적 배경에서 당대의 실존주의적 고민을 애니메이션에 반영한 것이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정체불명의 존재인 사도의 침략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3 신동경시 지하에 건설된 요새도시 지오프론트. 비밀결사단체 제레(SEELE)의 군사조직 네르프(NERV)는 이곳에서 사도에 맞설 인간형 전투 병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어낸다.

14세 소년 이카리 신지는 네르프의 총사령관이자,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강요로 에반게리온에 오른다.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에바의 파일럿이 된 신지는 아스카, 레이와 함께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사도와의 격렬한 전투를 이어가는 신지는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소심하고 우울하며,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매번 징징대는 신지를 보는 것은 괴로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답답한 행동의 이면에는 결핍과 트라우마가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에반게리온 실험 사고로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신지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한 유년시절의 경험으로 자기혐오에 시달린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존재해도 되는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어린 소년을 에반게리온에 오르게 했다.

단순한 로봇이 아닌 생체와 기계로 결합된 에바는 파일럿과의 뇌파 및 신경 동기화로 통제된다. 그래서 에바가 공격을 받으면 파일럿도 그 충격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울부짖으면서도 신지는 에바를 통해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찾으려 한다. 에바를 조종하는 ‘쓸모’를 증명하는 것만이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타인의 평가와 외부의 상황에 끌려 다닌다.


아버지와의 단절로 신지는 타인과의 관계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서는 방법도,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외로움과 거부당하는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슴도치 딜레마’에 빠져있다. 고슴도치는 자신의 온기를 전하려 하지만 다른 고슴도치와 가까워질수록 가시에 찔리고 마는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고, 남의 말을 순순히 따르며 희생하는 것이 신지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자신이 배제된 관계는 그를 갉아먹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런 신지가 주변인들을 통해 자신과 제대로 마주하기 시작하면서, 존재의 가치는 타인의 인정이나 에바에 의지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며 혼자만의 세상을 깨고 나온 신지가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애니메이션은 끝이 난다.


마지막 25-26화는 난해한 전개와 실험적인 연출로 방영 당시 팬들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독백과 정지 화면, 이미지로만 이루어진 두 회차는 자기혐오와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신지가 스스로를 인정하고 비로소 해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당시 제작비 부족과 촉박한 일정 때문에 결말을 급조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뛰어난 작화와 화려한 전투장면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오메데토(축하해)’ 밈은 두고두고 재생성되며 조롱의 대상이 됐다.


26화가 다분히 지루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독백 사이에 빠르게 지나가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인상적이었다. 이름, 방, 신발, 친구들, 아버지 등 놓치기 쉬운 이미지들은 신지를 구성하는 기호들이다. 즉, 자아는 세계의 표식물, 나를 둘러싼 관계로부터 기인함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은 전설의 오메데토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신지와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정체성의 혼란, 관계의 단절로 인한 고독과 소외감,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을 거쳐 끝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까지의 지난한 성장의 고통을 섬세하고 밀도 있게 다뤘다.

이어 감독은 TV판에서는 미처 매듭짓지 못한 ‘인류보완계획’을 극장판을 통해 완결 지으며 인간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이어간다.


제레(SEELE)의 원로들은 에반게리온을 이용해 개개인의 독립된 자아를 없애고 인류를 하나의 초월적인 의식체로 융합시키는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 외로움에서 벗어나 하나의 정신으로 완전해지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다.’는 그들의 명제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인간으로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타인과의 교류에서 나의 형태를 결정짓고 자아를 형성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대로, 철저한 개인이지만 사회적 관계를 갈망하는 모순적인 존재가 우리다.

자신의 존재의미를 알지 못한 채 세계에 유기된 인간,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스스로 결정짓도록 운명 지어진 인간. 미완의 상태로 태어난 우리는 그래서 서로가 필요하다.


이것이 14세의 소년·소녀뿐 아니라 에바를 연구하고, 지휘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이유이다.




신지가 '나'로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마지막 3분 동안 다시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이 흐른다.


주인공들의 불안정한 모습은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를 상실한 1990년대 일본인들과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타인은 지옥이고 관계는 괴롭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성장의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신화를 이뤄낼 수 있는 용기를 노래한다.


그리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스스로의 딜레마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세상의 모든 고슴도치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운명조차 아직 모르는 순진한 눈동자.
하지만 언젠가 깨닫게 되겠지.
그 등에는 머나먼 미래를 향해 날기 위한
날개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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