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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없다

PSYCHO-PASS

by 작중화자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


여기, 완벽한 세계가 있다.

규격화된 표준형 남자와 여자가 대량 생산되고, 계급에 따라 직업이 주어진다. 아이들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반복적인 수면학습과 세뇌를 통해 ‘행복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다.

책임은 전무한 채, 오로지 오락과 쾌락으로 이루어진 사회. 노화나 적성에 대한 고민도, 방종한 삶에 대한 근심도 없다. 마약성 약물인 ‘소마’ 한 알이면 불쾌한 감정조차 해소된다. 그저 집단에 순응하고, 유도된 기능대로 사는 것이 미덕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부여한 안정 속에서 시민들은 애쓰지 않아도 편안한 인생을 누린다.

전에 없던 신세계, 이곳은 ‘유토피아’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는 이 완벽한 세계가 사실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철저히 박탈한 디스토피아임을 경고한다.

과학의 발전이 낳은 통제 사회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훼손되는지 여실히 드러내며, 불행을 감수하지 않는 행복이 진정한 이상향인지 되묻는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신세계를 그린 애니메이션 <PSYCHO-PASS(2012)>가 있다.




<PSYCHO-PASS>의 세계에는 법원도 재판도 없다. 사법체계가 소멸한 사회에는 질서를 유지하는 절대적 존재, 시빌라 시스템이 있다.

시빌라는 도시 전역에 설치된 사이매틱 스캐너를 통해 시민들의 심리상태를 숫자와 색으로 계측하고, 나아가 ‘범죄계수’를 산출해 잠재적 범죄자를 판별한다.

범죄계수가 기준치를 넘어가면 위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아도 통제 대상으로 분류된다. 그들은 수용시설로 보내지거나, 집행관이 다루는 특수무기 도미네이터에 의해 즉시 사살된다.

공안국 감시관으로 부임한 아카네는 집행관 신야와 함께 첫 사건을 수사하다 시빌라 시스템의 모순과 마주한다.

상대의 범죄계수를 읽어 처벌을 결정하는 도미네이터가 오히려 범죄피해자를 ‘제거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다.

피해자의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가 범죄계수를 상승시켰고, 시빌라는 그를 갱생 불가능한 존재로 판정해 버렸다.

반면, 타인의 감정이나 사회적 규범을 고려하지 않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은 범죄계수에 변동이 없어 도미네이터로는 처벌할 수 없었다.


범죄를 예측해 미리 막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시빌라 시스템이라는 관리자에 의해 사회 전체가 감시되고 통제된다는 점에서는 제레미 벤담의 거대한 판옵티콘(Panopticon)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범죄율 0%에 수렴하는 이 세계의 평화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른 결과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소거해야 할 사회의 악일 뿐이다.


시민들은 사회의 구조적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의심을 거둔 평온 속에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또한 시빌라는 개인의 정신구조와 재능을 파악해 적성과 직업까지 제시한다.


인생의 보람, 삶의 의미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오직 아카네만이 자신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점이 다분히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아카네는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시빌라의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그 정체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면죄 체질자’라고 불리는 반사회성 인격장애 범죄자들의 뇌를 연결한 집단지성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이들이 역설적으로 사회의 공정한 판단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잔혹하고 부조리한 진실 앞에서, 아카네와 신야, 그리고 두 사람의 대척점에 있는 쇼고는 서로 다른 신념을 갖고 시빌라에 대항한다.


아카네는 시빌라의 모순과 비윤리성을 인식하면서도,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질서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스템의 파괴가 아닌, 제도 안에서 인간의 존엄과 도덕적 판단을 회복하려 한다.


반면 신야의 정의는 제도 바깥에 존재한다. 그는 법과 질서보다 인간의 감정과 양심에 따라 범죄자를 심판한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쇼고는 시빌라 자체를 부정한다. 그는 감정과 사고의 자유가 억압된 사회를 ‘죽은 세계’로 규정하며, 시빌라를 파괴함으로써 인간이 다시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또 다른 폭력과 혼란을 낳고, 타인의 생명을 대가로 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딜레마를 남긴다.


아카네의 정의는 질서 속의 인간성,

신야의 정의는 본능에서 비롯된 윤리,

쇼고의 정의는 절대적 자유다.


그들의 가치관과 신념은 서로 충돌하지만, 결국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같다. 바로 인간성의 회복이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은 섬세하고 복잡하며 불가해하다. 불안과 공포,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제거’되어야 할 결함으로 치부되고, 인생에 대한 어떤 숙고도 없이 그저 정해진 대로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자유의지와 사유하는 힘을 뺏긴 인간은 조작되는 존재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들은 결함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있게 한다.

<PSYCHO-PASS>는 완벽한 통제 시스템이 과연 정의로운지, 인간의 불완전함을 배제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이 가능한지 묻는다.




훌륭한 작화와 연출, 그 안에 담긴 철학까지 <PSYCHO-PASS>는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번쯤 이 애니메이션을 다루고 싶었던 이유는, 빈틈없이 조율된 질서가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침해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와 <PSYCHO-PASS>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완전한 사회를 포기함으로써 완벽을 성립시킨 역설 속에서, 인간은 자유의 대가로 거짓된 안락을 얻었다.

하지만 진정한 유토피아란, 결함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결함조차 품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닐까.


불행해질 권리를 잃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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