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님애기는 갓생을 살았다

설화 '명진국 따님애기'

by 장아연
생불꽃: 인간의 생명을 잉태하고 번영을 가져다준다.


먼 옛날, 동해용궁엔 따님애기가 살았다.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어릴 적부터 말괄량이였다. 용궁에서 말썽 피우기를 즐겨서 동해용궁 내외의 걱정을 샀다. 이에 분노한 동해용왕은 따님애기를 무쇠 상자에 가두고 인간세상으로 내려보냈다. 아이를 잉태하는 생불왕이 될 것을 명 받은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막상 가장 중요한 걸 듣지 못했다.


생불왕이 된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아이를 잉태하는 법만 익혔지, 아이를 낳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걸 배우기도 전에 분노한 동해용왕이 따님애기를 무쇠 상자에 가뒀다. 어느 날, 쉰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한 부부가 동해용궁 따님아기에게 찾아왔다. 따님애기는 흔쾌히 부인에게 아이를 내렸는데 출산 일이 다가오니 아이가 나오지 못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부인은 죽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옥황상제는 다른 따님애기를 찾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명진국 따님애기는 평범하지만 똑똑했다. 부모를 공양할 줄 알며 천리를 내다보는 영특함도 두루 갖추었다. 옥황상제는 명진국 따님애기를 생불왕으로 세워 부인에게 보냈다. 명진국 따님애기의 도움으로 부인은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자기 자리를 위협받은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몹시 분개했다.


"이 세상의 생불왕은 나 하나뿐이다! 아이를 잉태한 건 나인데 네가 왜 나서느냐?"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옥황상제의 감시 하에 내기를 진행했다. 옥황상제는 둘에게 나무동이와 은동이를 주었다. 나무동이의 물을 은동이로 옮겨 담게 하였다. 명진국 따님애기의 물은 한 방울도 줄지 않았으며 동해용궁 따님애기의 물은 금세 사라졌다. 옥황상제는 두 사람에게 꽃씨를 주어 키우게 하였다. 명진국 따님애기의 꽃은 탐스럽게 자랐지만, 동해용궁 따님애기의 꽃은 뿌리와 가지만 무성했다.


옥황상제는 명진국 따님애기를 아이의 생명을 잉태하는 생불왕으로,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저승에서 죽은 아이들을 돌보는 저승할망에 봉했다. 결과를 승복할 수 없던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저승으로 데려가리라 협박한다. 총명한 명진국 따님애기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마음을 먹는 게 어떻습니까? 인간을 잉태하여 받는 인정의 몫을 그대에게 부치겠습니다."


그 말에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마음이 풀려서 결과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명진국 따님애기는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는 삼승할망,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저승을 관장하는 저승할망이 되었다. 명진국 따님애기는 생불꽃과 번성꽃을 들고 인간을 위해 일하며 번성을 도왔다.




이 설화가 특별한 건 평범한 인간 명진국 따님애기가 오로지 총명함으로 동해용궁 따님애기를 이긴 점이었다. 이렇듯 설화에선 평범한 인간이 공덕을 쌓아 신격 인물을 이기는 게 자주 등장했다.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격 인물에게 대적할 수 없으나, 명진국 따님애기는 동해용궁 따님애기를 달래주며 평화를 도모했다. 이 설화를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명진국 따님애기는 굉장한 갓생러였다.


갓생이란 무엇인가. 신을 뜻하는 갓(God)과 삶을 뜻하는 생(生)이 합쳐진 신조어였다. 어느 날부터 등장한 갓생이란 신조어는 미라클 모닝과도 연관이 깊었다. 자기 삶을 스스로 정리하며 원하는 대로 산다는 의미였다. 일각의 시선으론 MZ들은 갓생에 관심이 많다고 보도되기도 하였다.


어쩌다 보니 MZ가 되어버린 사람으로서 언제나 갓생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10대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를 고대했다. 술과 담배, 유흥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20살부터 내 삶을 책임질 사람은 나였다. 보수적이고 규율을 지키길 좋아했던 10대의 나는 친구들이 한 번쯤은 해본다는 '대신 공기계 내기' 같은 수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자기기를 멀리하고 인쇄 매체를 자주 읽고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 못했던 10대 시절엔 20살 이후에 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특히 나는 루틴을 갖고 싶었다. 학교에 다닐 적엔 고정 시간이 있으므로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지 못했다. 하지만 20살 이후는 달랐다. 시간표를 마음껏 짤 수 있었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었다. 내 갓생에 대한 열망은 20살이 되자마자 발현되었다.


새벽 6시 기상. 아침 수영. 오전 아르바이트. 학교. 그리고 글쓰기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다. 중간에 낮잠도 잤으며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특히 그때 정말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사람을 만나는 빈도수가 늘어나면서 내 루틴은 점차 무너졌다. 연락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싸우는 곳에 가까이할수록 나는 내 삶을 잃어버렸다.


'이게 정말 맞는 건가?'


줄곧 든 생각이었다. 대략 2년 정도 나는 루틴이 무너진 채로 살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했고, 성공하고 싶어서 글을 썼다. 내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으며 그들이 나를 버리지 않는 게 내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벼랑 끝까지 몰리던 차에 홧김으로 모든 걸 그만두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명진국 따님애기는 동해용궁 따님애기를 현명하게 포섭했다. 사실 내기에선 명진국 따님애기가 이겼지만, 그렇다고 동해용궁 따님애기가 나쁜 건 아니었다. 동해용궁 따님애기는 자기 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쓰였지만 사실 사회에선 그런 사람도 필요했다. 자기 본능과 욕망에 충만한 사람이 없으면 인간군상은 비슷해질 거다. 무엇보다 동해용궁 따님애기가 소위 말하는 빌런이었다면 저승할망이 되지도 않을 거다.


명진국 따님애기와 동해용궁 따님애기가 21세기에 태어났으면 각자 타고난 기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 필요 있는 일을 했을 거다. 갓생의 기본은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 내가 만족하는 삶을 꾸리는 거니까. 처음엔 꼭 새벽 6시에 기상하고 무언가를 해야만 갓생이라고 생각했다. 2년 정도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니 생각이 변했다.


내가 알고 시행했던 갓생의 루틴은 표면적이었다.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진짜를 찾기 위해선 표면적인 것보다 그 내부의 것에 집중해야 했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지금에야 알았으니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나대로 살고 싶었다. 평범한 명진국 따님애기가 삼승할망이 된 듯이 누군가에겐 나도 필요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책을 덮고 잠시 숨을 골랐다. 더 먼 길을 가기 위해선 휴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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