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연애
둘 다 35살이었던 신혼여행 때 아내가 침묵시위를 왜 했는지, 37살 이직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아내가 왜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 이해하려면, 27살 처음 우리가 만났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아내가 사회 초년생,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던 27살 때 교제를 시작했었다. 그때까지 나는 제대로 된 연애경험이 없었다.
장기연애 경험이 있던 아내입장에서는 어쨌든 연애초짜와 교제하게 된 것이었는데, 불편함이 많았다고 한다. 덤벙거리다 이것저것 잘 잃어버리고, 쓸데없이 자주 삐지고, 자존심을 내세우고, 여자의 마음을 잘 몰라 이것저것 지속적으로 상처를 줬다. 대화할 때는 들어주기는커녕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는 편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찌질했던 남자였다. 무엇보다 아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너~~ 무 동생 같았던 것이었다. 아내에게는 내가 불안해 보였다. 의지하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신연령이 낮은 것이 아내를 가장 힘들게 했던 부분이었다.
첫 이직
29살 1월, 화려한 여의도 빌딩 숲을 헤치고 10분을 올라가면 국회의사당 근처에 첫 직장이 있었다. 입사 2년 차, 서른 살의 나는 사수와 싸우고 심란했었다. 마침 같은 여의도에 있는 K사에서 면접제의가 와서 갔다가, 벌컥 합격을 해버렸다.
K사 면접관이었던 고태성 이사는 내 원래 직장을 빨리 그만두도록 종용했다. 최종합격통보없이 고이사는 입사하게 되면 사수가 될 김 과장과 인사를 시켰다. 김 과장은 내 연봉을 묻더니, 여기도 비슷한 수준의 연봉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K사는 당시 가장 유명한 외국계 IT회사 중 하나였다.
엉겁결레 옮기기로 결정하고, 이전 직장에 퇴사한다고얘기한 상황에서 계약서에 사인하러 갔다. 맙소사. 아무리 계약서를 뜯어봐도 내 연봉은 구두로 들었던 것보다 1/3 이상 작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아닐 거야. 성과급이 따로 더 있던 지 하겠지.. 설마 이것밖에 안 주겠어?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입사했다. 연봉이 깎여서 화나는데, 고이사는 가장 더러운 일을 시켰다. 업무량이 너무 많아 하루에 2, 3시간 밖에 잘 수 없었다. 민원도 많았다. 내가 판 물건도 아닌데 한 시간 넘게 쌍욕을 퍼붓던 고객도 있었다. 힘겨운 한 달 뒤 월급을 보니 우려는 사실로 드러났다.
지금 생각하면 신중치 못하고, 지혜 없이 화려한 빌딩에 현혹된 내 탓이 더 크다. 화이바를 쓰고 화투 치는 사람처럼 내 패를 다 보여줘 사기 치기 좋게 해 준 셈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연봉도 제대로 안 알려주고 나를 꾀어낸 고이사에게 화가 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화병이 날 것 같았다.
회사를 나가겠다고 하니, 인사부에서는 고 이사밑에 사람들만 계속 나간다며 한탄했다. 하지만 어떤 조치를 취해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2번째 회사도 석 달 만에 나오게 되자 당시 내 여자친구였던 아내는 나를 떠나 버렸다. 당시에는 내 상황이 어려워지니, 여자친구가 떠났다고 생각하고 원망했다.
여자입장에서는 나는 책임감 없고, 쉽게 회사를 관두는 믿을 수 없는 남자였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평생을 의지하기에는 불안했을 것이다.
내입장에서 나는 처음 하는 사회생활이 힘들어 일어나는 방황이었다. 나는 세상에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는 가련한 청년이었다.
첫 고난
"이런 일이 왜 내게 생겼을까?" 화나고 분해서 엉엉 울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 올라온 자랑스러운 자식이었는데, 졸지에 30살 무직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믿었던 사랑도 떠났고, 부모님도 아들을 마냥 지지해 주기 힘들었고, 해외유학 후 미국에서 일하겠다는 꿈도 모두 헛되어 보였다.
받은 퇴직금은 금방 떨어졌고, 돈이 없어 하루에 한 끼는 라면, 한 끼는 오이와 계란프라이로 끼니를 때웠다. 하루 세끼는 사치였다. 아르바이트, 실업급여, 계약직을 전전하며 생계를 힘들게 꾸리며 회사에 지원을 했다.
이때 불어닥친 서브프라임 모기지 경제한파는 진행 중이던 채용도 중단시키고, 기 합격자도 합격취소를 날릴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괜찮은 일자리를 잡기는 정말 어려웠다. 행색이 초라하니 이전회사 동기, 대학동기 다 만나기 싫어서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답답해서 교회만 다녔다. 새벽기도, 금요예배, 주일 대예배를 다 혼자 다녔다. 그러다 문득, 제대로 성경책을 한번 믿어 봐야겠다는 마음이 어디선가 올라왔다. 처음으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수없이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자랐지만 신앙이 확실하지는 않았던 때다.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님이 잘 믿기지 않았다.
"내 품었던 꿈도, 부모도, 애인도 모두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말씀을 믿고, 한번 살아보자."
"말씀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수천 년 동안 검증 되어 온 것 아닌가? 말씀이 틀리든 맞든 죽는 날까지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보자. 이걸 믿다 죽으면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거다."
왜 갑자기 이런 결단을 하게 되었을까? 삶이 힘들니 목사님들의 위로의 말씀을 많이 찾게 되었고, 듣다 보니 믿음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평생 새벽기도회에 나간 어머니의 기도에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본격적으로 '읽기도 전에 믿기로'했다. 믿음을 선택한 것이다
믿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성경을 읽으니, 내용이 웅장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설레는 마음으로 성격책부터 폈다. 성경은 믿음으로 쓴 책이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자리를 달라던 간절한 내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았다. 수십 군데의 회사에 떨어지기만 하니 지쳐만 갔다.
마태복음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고난을 거두어 달라"라고 기도하신다. 그리고 거절당하시고 결국 십자가를 매게 된다.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태복음 26장 39절)
마치 예수님이 "너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속상하지? 나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었단다."라고 얘기하시면서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았다.
친구들 연락하기에 내 상황이 부끄러워, 홀로 보내는 외로운 나날이었다. 그때는 이런 구절이 크게 보였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5장 14~15절)
"명하는 대로 행하면, 예수님이 내 친구라고?" 든든한 친구가 생기니 외롭지 않았다. 큰 위로가 되었다. 성경책을 읽으면 외로울 일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성경책은 내게 실질적 위로였고, 고난 중에서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성경을 끼고 살다 보니 어느새 나는 예수님 같은 성품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진실로 나의 인격이 되길 소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6 KRV
1년 이상 새벽기도를 다니고, 성경을 읽다 보니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잘못한 것들이 깨달아졌다. 특히 아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내 눈에 있던 들보를 보지 못했다. 마음대로 굴었던 내 지난날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6:42 새 번역
첫 직장에서 나오고 1년 넘는 시간을 새벽기도와 성경을 친구 삼아 버텼다. 그리고 지금의 대기업 그룹사로 경력직 입사에 성공하고, 지금의 아내인 전 여자친구를 찾아갔다.
"나 많이 변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철없이 없었다. 미안하다. 다시 만나보자"
다행히 만나는 사람은 없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다시 나타난 나는 예수님 같았다고 한다. 웬만하면 양보하고, 이해하려 하고…
성품이 온화해져서 많이 놀랐다고 했다. 나의 변한 모습에 아내는 희망을 봤고, 다시 교제를 하게 되고 결국 결혼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