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가장이 있어야 싸우지 않는다.
네 번째, 집안에 '찐 가장'이 있어야 싸우지 않을 수 있다.
나는야 야매 심리치료사
내 아이디는 보시다시피 '아빠는 치료사'다. 아들이 ADHD 판정으로 한 심리상담소에서 놀이치료를 시작할 때 였다. 가녀린 체구의 여자 상담 선생님이 첫 상담을 마칠 때 쯤 밝은 얼굴로 말했다.
"치료사로서 아이 마음을 잘 보겠습니다."
'치료사'라는 표현에 좋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언어치료사'라는 문구를 네이버 카페에서 봤던 게 생각나서 그럼 나는 아빠니까 '아빠는 치료사'라고 생각하고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험담을 나누기 위해 '비약물치료연구소'라는 네이버 카페를 만들고 '아빠는 치료사'라는 닉네임을 쓰기 시작했다. 가족 내에서의 나의 정체성을 '치료사'로 정의한 것이다. 상담 주요 고객은 아내, 아들, 딸이다.
가족의 마음 건강회복을 돕겠다고 셀프로 치료사라고 선언하고 나니 기쁨 마음이 생겼다. 훗날, 우리 가족이아빠 덕분에 마음이 건강해졌다고 말해준다면, 굉장한 보람과 기쁨을 얻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치료사'라는 내 부캐가 좋았던 것 같다.
리더가 없는 집은 싸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치료사'된 것은 내가 집안에 '가장'이 된 것과 같은 의미였다.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리더? 회사를 생각해 보자. 팀장, 부서장, 사장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의사결정'이다. 이 자금을 여기에 투자해도 되는지, 이 사람에게 이 일을 시키는 게 맞는지, 그런 걸 결정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
우리 집을 돌아보면, 나는 경영학을 전공했고, 투자에 관심이 많다. 공부도 상당히 한 편이다. 부동산, 주식 등 아내와 나의 노동소득을 가지고 투자결정은 주도적으로 했다. 나는 투자의사 결정에서만 리더였다.
아내는 내가 휴직하기 전 까지 4년을 육아휴직했다. 살림과 자녀 양육에 있어리더였다. 살림살이를 무엇을 사고, 무엇을 버리고, 아이들 교육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런 의사결정은 아내가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합리적 분업인 거 같아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남편이 '돈벌이'에 있어 리더고, 아내가 '살림과 자녀양육'에서만 리더라고 치자. 그렇다면 이 두 업무의 통합리더는 없는 셈이 된다. 둘 다 리더라고? 해 아래 두 명의리더는 없다.
돈벌이 리더인 내가 돈을 잘 번다면, 나는 내 업무를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당당하다. 그런데 작년에는 1억 벌었는데, 올해는 열심히 해도 5천만 원 밖에 못 벌었다 치자. 그렇다고 아내에게 그만큼 손해배상해 주는가? 이건 누가 책임지나?
아내가 아이가 하도 조르길래 보낸 학원이었는데, 선생님이 아이를 때렸다. 혹은 그곳 친구가 아이를 괴롭힌다. 이런 문제는 아내가 똑바로 알아보지 않은 책임인가?
살다 보면 원인에 대한 소재가 밝혀지지 않는,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이 아주 많다.
이럴 경우, 진짜 리더, 찐가장이 없는 집은 중재안을 찾지 못하고 서로를 탓 하며 싸운다. 우리 집은 그랬다.
'마음 돌봄'을 자신의 일로 여기는 사람이 그 가정의 가장이 된다.
내가 우리 집 구성원들을 위한 치료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후 부터, 나를 제외한 셋 중에 누가 요즘 마음이 약한가를 계속해서 살피게 되었다. 매일 매일 일상을 확인을 하는 편이다.
"첫째가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구나. 둘째가 오빠 때문에 이렇게 힘들었구나."
"아내가 오늘 아들 때문에 마음이 상했었구나..."
날마다 느끼는 그들의 감정을 알아주고, 보살펴 주려 했다. 항상 시선은 제일 마음이 약한 사람으로 먼저 갔다. 처음에는 아들이었다가, 아내가 심각한 걸 깨닫고 아내를 더 잘 돌봐주는 게 가장으로서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잘 지내다 가끔 불만을 크게 터트리는 딸도 잘 보고 있어야 한다. 가족은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 한 명이라도 우울하면 다 같이 우울해져 버린다. 그런 분위기를 막아내고 싶었다.
옛날 IMF때 많은 아빠들이 실직을 했다. 그때 "같이 힘내자. 우리남편 최고야."라며 기죽은 아빠들을 격려하고 기를 세워 준 평강공주 같은 엄마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그 집의 실질적 가장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 집의 아빠는 실상 '바지 가장'에 불과하다.
가족의 '마음 돌봄'을 자신의 일로 여기는 사람이 그 가정의 '찐 가장'이 된다.
나는 왜 우리 가정의 치료사가 되었을까? 상대적으로 커다란 응원과 사랑, 그리고 수용을 경험했기에, 자책이 많은 아들과 아내에게 너무 속상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동작이 너무 느려서 학교를 늦는다 거나 할 때 소리를 질렀었다. "내 엄마는 한 번도 이런 적 없는데..."이런 생각이 나를 막아서곤 했었다. 받은 게 많으니 양심이 찔렸다. 보이지 않지만 감정자산 상속을 크게 받은 것이다. 그래서 줄 것도 상대적으로 많다.
하지만 객. 관. 적. 으. 로. 아내가 자란 강남 8학군 환경은 격려와 응원, 수용과 거리가 아주 아주 멀다. 학벌이 최고 가치인 곳에서 자란 아내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자신을 격려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싫어했다. 그런데 자기 자신도 아낄 힘이 없는 사람이 남편과 자녀를 어떻게 아낄 수 있겠는가? 싸우기 싫다면 마음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한 사람이 나설 수 밖에 없는 문제다.
그럼 아내, 아들, 딸 모두 나를 통해 힘과 용기를 얻으면 나는 어디서 마음 돌봄을 받나? 당장은 나에게 있는 성경이 나를 격려한다. 엄마의 도움으로, 내 삶의 시련을 통해 열심히 외운 수십 편 말씀이 나를 격려한다. 부족하면 설교를 듣고 근처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한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족의 평안에 도움이 된다. 아내에게 기대하는 순간 언쟁이 된다.
가족을 의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이끌어 주고 마음을 돌봐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부정적인 사건에도 책임져 주겠다는 마음을 가진 진짜 가장이 우리 모든 가정에 필요하다. 그래야 싸우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집의 찐가장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가?
배우자가 찐 가장노릇을 안하니 답답하실 수 있다.
허나,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님들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 때문에, 가정을 지키고 싶어서
여기까지 읽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축드린다. 무보수 명예직 '찐 가장'이 되셨다. ㅎㅎㅎ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