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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리향 Oct 08. 2024

고통의 오름을 등반하는 시지프스

 나의 고통은 홍조를 타고 온다. 엷은 홍조가 얼굴 위로 번지면 고통이 찾아올 채비를 한다. 불편함이 보낸 초대장을 흔들며 홍조는 얼굴을 점점 핏빛으로 붉게 물들인다. 그러면 고통이 나를 휘저을 준비를 마치고 나는 본격적으로 오름을 쌓기 시작한다. 고통의 오름이다. 오름은 내가 고통을 등반한 흔적들이다. 나는 고통을 쌓으며 오름을 등반하고 정점에 올랐다가 서서히 내려온다. 오늘 여기에 서서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수많은 오름들이 펼쳐져 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크고 웅장한 것들이 오름의 광활한 밭을 이루고 있다.

  오름을 빚는 고통은 인생의 경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내 20대 이후의 오름은 건조하고 단조롭다. 지나치게 두드러진 특정 고통이 다른 고통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린 탓이다. 삶의 경험이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로딩 문제가 찾아오기 전에는 친구, 놀이, 사랑, 직업, 가족, 등에 대한 다양한 꿈을 꿨다. 하지만 로딩 문제를 떠안고부터 점점 그러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을 우선순위에서 완전히 밀리고 말았다. 삶이 로딩 문제에 천착하면서 다른 고통이 머물 자리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로딩 문제의 오름에 오르면 첫 번째 찾아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다. 두드려도 펴지지 않는 답답함이 목젖과 명치 위 언저리를 사정없이 조여 온다. 이성은 이 불편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무의식의 준동을 억누르려 갖은 애를 쓰지만 소용이 없다. 뇌에 과도한 혈류를 일으켜 뇌압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을 뿐이다. 결국, 뇌혈관은 굴복하고 썰물처럼 뇌압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나의 두뇌에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으면서 이성은 저항할 에너지를 모두 상실한 채 동력이 끊긴 마리오 네트처럼 축 늘어져 버린다. 나의 이성이 맥없이 무너지면 극도의 어색함은 피할 길이 없다. 누군가는 도망쳐야 한다. 내가 줄행랑을 치거나 아니면 나는 쓸쓸히 내팽겨 처져야 한다. 그것으로 육체적 고통의 절정은 끝이 난다.

  설령 그러하더라도 육체적인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가슴과 목젖을 짓누르는 압박이 여진처럼 남아 맴돈다. 하지만 이내 찾아오는 정신적인 충격의 쓰나미에 휩쓸려서 결국 숨을 죽이고 만다. 정신적인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날카롭고 훨씬 치명적이다. 나는 엉망으로 망가진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에 빠져든다. 매번 반복되는 오름에 시지프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이 오름을 끝내지 못하고 영원히 슬픈 운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고통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벤트는 끝이 났기에 오름도 절정에 이르고 나는 오름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앤드류 스마트의 「브레인」에 의하면 인간은 의사 결정에서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한다. 이성과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즉각적인 의사 결정 도구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 느끼는 불편함은 무의식이 즉각적으로 내린 판단이다. 이 불편한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라 한다. 그런데 이성이 이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무의식은 이 불편한 상황을 위험으로 감지하지만 이성은 다른 판단을 내린다. 이성에 의하면 이 불편한 상황을 극복하면 이득이 크다. 낯 설은 누군가를 만나면 우리의 몸은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불편함을 이기고 편한 관계를 맺으면 돌아오는 이득 또한 클 수 있다. 이 경우 이성은 무의식이 내린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고 미래를 위해서 무의식의 판단에 반기를 든다. 무의식을 억압하며 불편한 상황에 익숙해지라고 강요한다.

  로딩 문제 오름에 오르는 것 역시 나의 이성이 무의식을 억누르면서 발생한다. 나의 이성은 이 불편함의 해소를 원한다. 그랬을 때 이익이 크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무의식은 이성이 누른다 해서 마냥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 로딩 문제처럼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이성의 작용을 무력화시킨다. 무의식은 매우 강력하다. 이성이 무의식을 누를 수 있는 것은 누를 만하기 때문이다. 누를 수 없는 무의식을 누르는 데 있어서 이성은 그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참함이며 고통이다. 로딩 문제로 인한 내 고통의 오름은 무의식이 이성에 저항한 흔적이다.

  다행스럽게도 무의식은 적응하며 순화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의 내용에서 변화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미세한 변화일 뿐이다. 그만큼 로딩 문제에서 무의식의 위세는 매우 거칠고 강력했다. 처음 로딩 문제의 오름에 오를 때는 거의 매번 홍조를 동반했다. 첫 직장인 H 중공업에서 홍조는 간헐적이 되었다. 무의식이 일정 부분 적응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적응이 그리 극적이진 않았다. 물론 시간이 더 흐르면서 가슴 답답함도 간헐적으로 변했다. 여전히 최종 단계는 이성의 역할 종료가 책임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괴감과 시지프스 트라우마에 대한 두려움은 변함없이 찾아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로딩 문제의 오름에 오르면서부터 나의 일상은 생활의 장이 아니라 훈련의 장으로 변해 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활공간을 빌어 훈련을 해야 했다. 가장된 생활 속에서 훈련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훈련을 위해서 당신네 생활공간을 빌어 써야 되겠노라고 고백할 수 없었다.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족들에게조차도 나의 처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은 고정된 거처에 머물지 못했다. 내 영혼이 겉돌 듯이 나의 거처도 떠돌았다. 생활과 훈련이 영원히 공존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훈련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완벽하게 숨기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과 훈련 사이에 이질감이 드러났고 그러면 나는 다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나는 훈련자의 마음가짐을 지닌 채 첫 직장에 들어갔다. 나는 더 많은 관계를 찾아 회사 밖 동호회에서도 활동을 했다. 동호회도 역시 단지 훈련의 공간일 뿐이었다. 나는 첫 직장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한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다 흘려보냈음에도 나는 고통의 오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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