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20살에 만난 남사친과 30살에 결혼했다. 세 아이를 낳은 후 찐한 우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절교의 충동을 느끼지만 빡빡하게 살다 보니 친구가 몇 명 안 남아서 절교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브런치북은 그 부부가 어쩌다 카페 사장이 되었는지 담을 예정이다.
우리의 시험은 언제 끝이날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지긋지긋한 시험에서 끝날 줄 알았다. 5지선다에 찍어도 20%의 확률은 언제나 존재했던 시험이 오히려 나았다는 것은 대학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려니 더 어려운 시험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절대 정답이라는 것이 없는 끝없는 시험. 누군가가 자구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있었으니.
젠장맞을~
결혼 10년 차, 딱 40이 되던 해였다. 남편이 오래 준비하던 시험에합격소식을 전했다. 마침 그날은 우리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는데,결혼기념일에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동안 고생한 나에 대한 보상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남편을 축하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험 준비한다고 도서관에 가버리고 나면 세 아이의 독박육아를 하던 내 모습이 먼저 스쳐 지나갔다.
'너도 나도 이제 좀 편해지겠구나'
내 앞에 펼쳐질 꽃길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이때까지만해도 그저 걸리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정도는 되기를 바랐다. 마흔이니까. 마흔엔 좀 안정된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
결혼 한 다음 해에 첫 아이를 만났다. 31살에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두고 다시 직장에 나갈 엄두고 나지 않아 3개월 산후 휴가가 끝나갈 때 고민이 깊어졌다. 퇴사할 용기는 나지 않아 마음같아선 육아휴직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고생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니 ‘휴직할까?’란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 깊은 속을 알 리 없는 남편은 그 틈을 노리고 선수를 쳤다.
"나 육아휴직하면 안 될까?"
"뭐? 왜? 니가 애났니?"
지금은 흔하지만 20여 년 전은 남자가 육아휴직을 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기술사 시험을 보고 싶은데 올해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됐어. 해보고 싶어."
"............. 엥?"
기술사는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과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고도의 전문성을 인정받는 국가기술자격증으로, 해당 분야에서 설계·감리·지도 등 핵심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합니다
기술사 시험은 기사 자격을 취득한 후 현업에서 4년의 경력을 가져야만 자격이 주어지는데, 딱 4년이 되는 절묘한 타이밍에 첫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맞벌이를 하며 어떻게 아이를 케어해야 하나 고민하는 대신 남편은 이때를 이용하여 자신의 커리어를 쌓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분야였기 때문에 너무 쉽게 'YES'라 말했다. 뭐 1~2년 투자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무지함이 나의 30대를 육아로 독박 씌웠다.
산후 휴가가 끝나자 어머니께서 육아 지원군으로 집에 오셨다. 우리는 아침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오붓하게 집을 나섰다. 남편의 육아휴직 소식을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 어머니는 열심히 살아가는 아들부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아이를 안고 배웅했다. 너무 평화로운 광경 아닌가? 출근룩을 하고 함께 집을 나서는 우리의 연극도 딱 3개월이니 그때까지 이 평화를 유지하자며 나는 전철역으로, 남편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겉으로 보면 ‘바쁜 맞벌이 부부’였지만, 실은 ‘위장 출근 부부’였던 셈이다.
7년 차 공무원의 월급은 예나 지금이나 소금에 푹 절여놓은 것 같이 짰다. 게다가 육아휴직 수당은 고작 50만 원. 어머니께 용돈을 넉넉히 드릴 형편이 못 되니, 가끔 불쑥불쑥 올라오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가 하루 종일 먹고 자는 게 전부인 ‘모범 신생아’였다는 점이다. 게다가 모유는 넘쳐났으니, 우리 집의 주요 지출은 사실상 기저귀값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이가 건강하고 순했던 것이 남편의 ‘위대한 계획’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철로 한 시간 이상의 거리를 한쪽 손에는 모유가방을 들고 출퇴근하는 것은 매번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었다.
'오늘은 차 갖고 갈까?'
고속도로를 달리면 40분 거리지만 고속도로 통행료에 주유비까지 계산해 보면 절대 차를 갖고 나설 엄두를 낼 수가 없는 살림이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경기도에서 충청남도로 도를 넘나드는데도 교통비는 한 달 10만 원이 안되니 우리나라의 값싼 대중교통 덕을 톡톡히 보았다. 해외를 다녀봐도 우리나라만큼 편하고 값싼 대중교통이 있었던가?
비가 오는 날은 그나마 우리가 사치할 수 있는 날이었다. 남편은 비의 감성에 촉촉이 젖어 마음을 중심을 잃는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 앉아 있는 것도, 혼자 값싼 주먹밥으로 한 끼를 때우는 것도 서글퍼지는 날, 때 맞춰 비가 내렸다.
수유가방으로 무거워진 손에 우산까지 들고 전철역에서 내려 20분을 걷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서글프다. 비가오면 남편은 나의 출근길에 동행했다. 내 직장 근처의 도서관을 알아봐 오전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만나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잠깐의 데이트는 삶의 활력이 되어주기도 해서 비 오는 날이 기다려졌다. 지옥철을 타고 출근해야 하는 내일이 두려워 '내일은 비가 와라. 비가 와라'라며 마음 속으로 외다 잠든 날도 많았다.
정해진 3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남편은 1차 합격 소식을 선물처럼 안겨줬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것일지 모르겠지만 기뻐하는 남편을 보니 나도 또한 감격한 것인지, 이제 회사를 잘 다닐 거라는 안도감인지 모를 기쁨과 홀가분함이 스쳐갔다.
남자가 육아휴직을 한다고?
그 당시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 그 말의 이면엔 '남자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어?',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라는 의문이 깔려 있었다. 직장인이 법률로 정해진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함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복직 이후였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회사는 사원의 자기개발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남편을 다른지방 지사로 발령을 내는 것으로 앞으로 회사에 일어난 동요에 대비했다.
‘아! 복지나 제도는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큰 배움이었다.
'안되면 안 된다고 알려주지 지금 와서 저에게 왜 이러시는 건가요?'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면 아마도 돌아오는 답은 '그걸 꼭 말해야 아니?‘ 였을거다. 다른 사람들은 말 안해도 다 아는 것을 우리만 몰랐다. 직장 생활하면서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그 정도 눈치도 기르지 못한 우리를 탓해야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런 부당함쯤은 감수해야 했다. 불응할 배짱도 새로운 문화를 만들겠다는 사명도 없는 나약한 직장인은 그냥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불의에 복수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몇 개월 뒤 2차 시험을 보고 최종 합격해서 '육아휴직은 직장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런 권리를 무시하는 회사에 굴복하는 것은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퇴사하겠습니다.'하고 멋지게 사표를 던지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런 최상의 시나리오는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쉽다.
그 후로 10년 동안 이어진 수험 생활. 남편은 취미생활하듯 일 년에 두 번 때가 되면 도서관에서 벼락치기를 했고, 그 사이 둘째, 셋째가 태어나 다섯 식구가 되었다. 시험일이 다가오면 한 달 바싹 하는 공부였지만 남편이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밤과 주말을 공부에 할애하면 육아는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남편이 힘든 만큼 나도 힘들었다.
남편이 공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만큼 나도 독박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편의 간절함만큼 나도 간절했다.
혼자 아이를 보는 주말이 되면 세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주먹밥을 나눠 먹었다. 주머니 사정이 않좋은 고단한 수험생들의 허기를 남김없이 채워줬던 추억의 주먹밥집, 물가상승률은 수험생을 먹여 살리겠다는 사장님의 의지를 꺽어놓아 10년 새에 300% 가파르게 인상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가끔 그 집에 들러 과거를 추억하곤 한다. 시간은 아픈 과거도 미화시켜주는 힘을 가졌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거짓말
남편은 항상 '내가 공부하는 것은 다 가족을 위해서야.'라고 말했다. ‘고마워 신랑 ㅠㅠ’ 이것이 남편이 생각한 방응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이 말이 너무나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긴 아니? 이것이 진짜 가족을 위한 것 맞니?’라고 반문했다.
남편은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아내가 야속했고, 아내는 육체적 고통을 공감받지 못해서 서러웠다.
그렇게 보낸 10년을 보상받기에는 '합격'이라는 두 글자는 기쁨보다는 씁쓸함을 남겼다.
시험은 우리 부부를 시험에 들게 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결국 우리의 승리인가?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을지는 더 살아봐야 알겠지.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