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20살에 만난 남사친과 30살에 결혼하고 40살에 사업 계획을..
이 브런치북은 그 부부가 어쩌다 카페 사장이 되었는지 담을 예정이다.
아버지는 평생 자영업을 하셨다.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치열하고 바쁜 사장님이었다. 70대 중반인
지금까지 하루도 일을 내려 놓은 적이 없으니 주말을 계산하거나 워라벨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는 삶이었다.
아버지는 365일을 일터를 지키셨고 지친 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일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버지의 표정에서 불편함이 읽히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눈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났다. 눈치는 키가 자라는 속도보다 빨리 자라서 만약 눈치가 키로 환산됐다면, 170cm가 넘는 장신이 되었을 거다. 아쉽다.
키에 관한 진실을 밝히자면 160cm이라는 키의 진실은 160cm만이라도 되고 싶은 간절함이다. 고로 나는 160cm라도 되고 싶었고 50살이 다 되도록 키타령을 하고 있다.
밥상에서 나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는 회사 돌아가는 사정이 대부분이어서 어린 나이에 '사업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신념이 자리 잡혔다. 암묵적으로 서서히... 그것이 우리 집의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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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여름이 되면 강으로 바다로 휴가를 다닌다는데 우리 집은 자동차도 있고, 아빠 명의로 된 자가는 있어도 휴가 계획은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여르 방학에 맞춰 '우뢰매'가 개봉하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방학을 맞은 우리 남매에게 어머니가 주시는 선물이었다. '우뢰매 1탄~5탄'까지 극장에서 보는 것을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휴가로 퉁치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가족끼리 2박 3일을 부대끼며 계곡에 텐트 쳤다가 모기때문에 한 숨도 못잤다는 친구들의 얘기가 더 부러웠다.
부모에게는 근심을, 자녀에게는 욕구불만을 주는 그것,
그것은 바로 死.업.
누가 사업한다고 하면 어떻게 말려야 할까? 도시락싸들고 다니면서 말리는 것은 너무 옛날 방식이겠지? 남편의 '합격' 소식이 '고생의 끝'이 아닌'고난의 시작'이었단 것을 그땐 알지 못했다. '소방기술사', '토목기술사'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회사에서 무조건 채용해야 하는 기준이 있어서 자격을 갖는 것만으로도 직위와 안정이 보장된다고 들었다. 그러나 자동차빠가 그렇게 사랑하는 자동차 최고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없.었.다.적어도 남편이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나 사업할래
死.업?
까딱 잘못하면 온 집안에 빨간 딱지가 덕지덕지 붙는 무시무시한 사업. 집이 사라지고 온 가족이 뿔뿔히 흩어졌다는 비극적인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보다.
자격증도 땄으니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선전포고에 나는 무너졌다. 사업가의 딸로 살아온 나는 절대 사업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사업은 언제는 안정적인 것이 아니어서 그 굴곡을 보며 자란 나는 회사 다니는 사람이 배우자 조건의 1순위였다. 매월 정해진 날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생활자가 나의 이상형이었는데. 절대 사업같은 것은 꿈도 안꿀 것 같은 우리 아빠와는 정반대인 극 I형 인간이라서 나는 너와 결혼했다구. 그런데....
사업을 하겠다고?
나는 남편의 말을 외면했다. 배우자의 동의를 얻지 못해 사업의 꿈을 품고 몇 년의 직장 생활을 지속했지만 끝내는 그를 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집 센 남편은 비추다. 미혼이라면 새겨 듣고 기혼이라면 어쩌겠는가? 그냥 업보라 여길 수밖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내가 애가 셋인데 막무가내로 저지르겠냐?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그 생각이 뭔데?'
'사무실을 좀 알아보려고 해. 그리고 자동차 볼 장비 몇 개랑 책상 하나만 들이면 돼. 준비가 되면 회사는 그때 정리할거야’
역시 말은 참 쉽다. 부모가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키운 자식들은 세상이 너무 만만하다.
자포자기로 함께 사무실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식산업센터 위주로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말도 안 되는 높은 가격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임대 말고 매매를 해서 시작하고 싶다던 남편의 입에서 스스로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의 예산범위를 초과했는데 그 수준은 상상 이상이었다. 10평 남짓 작은 공간인데 20평이란다. 주차장에 복도까지 공용면적으로 포함하여 평으로 계산하니 실제 보이는 평단가의 두 배로 체감이 되었다.
'내가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아마도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 했으니.
많지는 않아도 매달 정해진 날에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둘이 받으니, 그럭저럭 살만했는지 다른데 눈 돌리지 않고, 애 셋 낳을 동안 부동산이나 투자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통장에는 그 달 쓰고 남은 아주 소액의 잔고가 있었고 매달 조금씩 붓고 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적금 통장이 전부이니 투자는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했다는 것이 맞겠다. 그러다가 남편의 사업 선포로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비루한지 깨달았다.
부모 잘 만나 학비걱정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만 하면 어떻게든 해주시려는 부모님을 둔 덕인지 탓인지 남편에게는 헝그리정신이 부족했다. 잘 갖춰진 깨끗한 빌딩, 가장 잘 빠진 구조의 공간을 떡 하니 매입하여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기대감, 미드센츄리 스타일에 클래식 모던 감성을 입혀 리모델링을 해 놓으면 따뜻한 햇살이 창은 통해 들어오듯 엄청난 일이 몰려올 거라는 상상이 처참하게 무너지던 날. 남편은 조용히 속으로 울었다.
그리고 사업의 꿈은 저 멀리~ 떠나보낸 줄 알.았.다.
한 두 달이 흘렀을까?
'오후에 갈 데가 있어.'
'어디?'
'땅을 하나 봐 뒀는데 좀 보러 가려고.'
'땅? 땅은 왜!'
'응, 사업하려고.‘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 분명하다. 10년은 친구로 10년은 부부로 20년을 알고 지냈는데 표정 하나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니 앞으로 50년을 더 산들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역시 부부는 영원히 동상이몽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어'라는 비장함의 표현을 '나는 사업이 어렵겠구나'라는 처참함이라고 잘못 이해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 남편은 그돈이면 땅을 사서 건물을 올려보겠다며 기가차는 소리를 지껄이며 부동산 싸이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 돈? 혹시 그 돈은 있니?'이래나 저래나 돈은 없으니 은행을 이용하면 된단다.
이럴 땐 그냥 웃자.'허,허,허, 헛소리가 너무 지나치구먼. 내 못 들은 걸로 하지.’
남편은 꽤 진진했다. 유튜브로 도대체 뭘 봤는지 땅을 고르는 나름의 기준도 정했다.
땅이 크면 비싸고, 땅이 작으면 싸다.
모양이 예쁘면 비싸고, 안 예쁘면 싸다.
주변 인프라가 좋으면 싸고, 안 좋으면 싸다.
너무 단순한 논리지만 이를 통해 남편이 정한 기준은 '작고 안 예쁘지만 인프라가 좋은 곳'의 땅을 사는 것이었다. '껄,껄,껄' 실소가 터저 나온다. 인프라가 작고, 안 예쁜 것을 보완해 줘서 가격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배일 밤 방에 처박혀 작은 땅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산 범위에 있는 땅을 찾아 임장을 가면 번번이 실망하고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었다. 길쭉하고, 모나고, 울퉁불퉁하고 예쁘지 않아서 그동안 관심받지 못했을 법한 것들 뿐이었다. 반듯하고 예쁜 것들은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정도이니 멍하니 바라보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이쯤 되면 그냥 포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사업을 하겠다는 집념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어느 금요일 퇴근길, 조금 늦을 것 같으니 저녁을 먼저 먹으라는 메시지.
불... 길... 하다. 여자의 촉이 제발 틀리기만을....
여느 때와 같 허탕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남편은 어떤 서류 절차도 없이 소액의계약금을 계좌로 쏘고,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의 삶은 항상 예측 밖이다. 100번쯤 이혼을 마음에 품고, 2번쯤 이혼을 입 밖으로 발설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당신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난 아니더라.
그런데 이런 예측불가 덕분에 지루할 틈 없이 살았다. 이쯤 되면 내 삶을 스펙터클 하게 해 줬다면 감사함을 표해야 하나?
아리송하지만,이런 게 삶의 묘미라 생각해야 속이 편하다.
꿈은 종이접기가 아니어서 그렇게 쉽게 접히지 않는다는 것은, 좌절감 속에서도 다시 피어난다는 것은 희망일까? 불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