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부부가 카페사장이라는 부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대학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20살의 자유를 온몸으로 만끽하려면, 캠퍼스를 누비며 낭만의 밤을 보내려면 부모님 통제에서 벗어나야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머나먼 곳으로 가야만 한다. 고등학교 3학년 11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성실히 하고 3년 개근거지로 산 이유는 바로 ‘독립’이었다. ‘열심히, 더 열심히’ 채찍을 나의 엉덩이에 휘두르며 열심히 달렸다.
'아! 그곳이 북쪽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가 자주 가는 목욕탕 사우나에 앉아서 우리 딸이 인서울 했다고 자랑하다가 따가운 눈총에 민망해지면 냉커피 시원하게 쏘고 남은 이야기 마저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을 텐데... 나는 그런 엄마의 어깨에 뽕을 넣어줄 만한 딸이 되지 못했다. '엄마, 미안'
그래도 꿈을 포기할 수는 없어 독립을 하려면 남쪽으로 가야 했다. 남쪽, 더 남쪽으로... 집에서는 두 시간이상 걸려 도저히 통학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서는 곳으로.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내가 그 곳에 갈 실력(?)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공부 못해서 지방대 갔다고 말하는 것을 이렇게 미화해도 되나?)
학벌, 서열이 뭐가 중요해?라는 말을 하지만 나는 학벌 앞에서 아직도 위축되는 속물인가? 다른 것은 몰라도 내세울만한 학벌을 갖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근성을 높이 사고 위대함을 느낀다. 20살에 그걸 알았더라면 다시한번 도전!을 외치며 짐싸들고 재수학원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승부욕, 근성따위는 없었다. 다행히 그것을 엄마도 잘 아셔서 나는 푹신한 솜이불 한 채와 함께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맡겨졌다. ‘캠퍼스에서 낭만의 밤’이 물건너갔다는 슬픔에 겨워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울었다.
대학에 가서 처음 사귄 친구들은 다행히 나처럼 놀고먹기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매일밤 막차 시간을 확인하고, 그마저도 더 놀고 싶어 용돈을 택시비로 탕진해야 했던 친구들에게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넌 집에서 탈출했잖아.’
매일밤 친구가 탄 택시가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흔들어주는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 누구랑 더 놀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질 뻔한 30여년 전의 추억이다. 아! 그리운 나의 20대.
3시간 동안 연강하는 교수님. 화장실 갈 타이밍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누군가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어! 그냥 다녀와도 되나?’
대학은 화장실 갈 때에도 교수님께 허락을 받지 않았도 된다는 것을 눈치로 터득했다. 한 번은 20분동안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들어갔는데도 교수님이 눈치채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이후 내 자리는 덩그러니 가방이 지키고 있었고, 첫 학기 성적표가 나오는 날 교수님에게도 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사귄 친구는 고향이 충남 당진이라고 했다. 공강시간에 할 일 없이 교정을 어슬렁거리다가 그 친구의 둥문이라는 한 남자아이를 만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멸치같이 마른 체형이었는데 스키니한 바지로 마름을 과도하게 표출하였다.
‘뭐지? 동정심 유발의 전략인가?’
나는 멜빵바지(뽀빠이 바지)로 20살의 풋풋함과 귀여움을 발산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옷차림이었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친구들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다.
‘그때 얘기해주지. 니들이 더 나빠.’
꿈에 그리던 캠퍼스커플은 안티 친구들 때문에 꿈만 꾸는 것으로 끝났다.
처음 만난 멸치남과 뽀빠이녀는 같은 생각을 했다.
아, 별루다~
찌찌뽕~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그 아이도 나처럼 할 일없이 어슬렁거리는지 캠퍼스에서 자주 눈에 띄었고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군대를 가고 취업을 하고나서도 가끔 안부를 묻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우리는 결혼했다.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전개냐며 당황스럽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 친했더라면. 많은 시간을 공유하며 20대를 보냈더라면 과연 결혼했을까? 가끔 생사 확인 정도로 연락을 하며 시덥지 않은 대화로 마무리했고 서로의 사생활을 묻지 않았다.
결혼은 역시 타이밍이다!
왜 우린 하필 같은 시기에 외로움을 탔을까?
이 글은 나의 결혼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그 과정을 묘사하지는 않겠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이불킥을 부르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으니 잠시 그때의 생각은 묻어두려 한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양과 비례하지 않아, 결혼 후 우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바로 '니가 그럴 줄은 몰랐어'였다. 10년을 알아왔지만 서로에게 아는 것이 정말 없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항상낯선 모습을 보여주어 놀라고, 지지고 볶는 사이 우리에게는 세 명의 딸이 생겼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으니 대외적으로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자녀가 몇이냐는 질문에 ‘셋이요’라고 하면, 뒤따르는 답변은 항상 똑같았다.
'부부 사이가 좋으신가봐요. 호호호'
'개뿔!' 하면서도 굳이 손사레까지 치며
'그게 아니구요.~~'하고 변명하기도 구차하고 해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다.
'아, 네~~~ 허허허~'그 웃음에 담긴 깊은 의미를 그들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까.
어느덧 18년 차 부부가 되었고, 우리는 대학 때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눈다. 그때는 예의라도 차렸으니 꽤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가면을 벗어던지니 가끔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스럽다. 생리현상도 튼 지 오래라 이제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는 그런 사이. 까도까도 알수 없는 양파같으니라고.
18년을 함께 산 지금도 심장에 펌프질을 시켜 내몸에 뜨겁게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남편. 가끔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것처럼 피가 거꾸로 솟게 만들며 혈액 순환을 시켜주고, 희노애락 뿐 아니라 울분과 허무, 애증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알게 해주는 남편. 내가 글 쓸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해 준 준 남편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부부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사업파트너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좋아하는 것이 업이 되면 꿈의 실현일까? 취미의 파산일까?
진실을 밝히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